큰 소리로 노래를 듣는 이유.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
사람을 만났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뒤, 지친 상태로 도망쳤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길을 빠져나오니, 이제야 속이 시원하게 나아갈 수 있다. 어두운 도로, 반복되는 가로등을 지나가니 온갖 생각이 나를 덮쳐온다. 차는 앞으로 가지만, 생각은 더디 가게 된다. 불안이 손끝으로 스며들어오고, 걱정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들어온다.
내가 했던 말들이 잘못된 건 아닌지 복기를 한다. 뾰족한 말을 했는지, 오해를 할 만한 말을 했는지, 짚어볼수록 마음이 불편하다.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도망쳐 나온 내가 없는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불안하다.
이때, 노래를 듣는다. 가끔은 한껏 소리를 키워내고 듣는다. 둥둥거리는 소리에 온몸을 맡기고 목적지로 향해 간다. 시티팝으로 마음이 가지런하게 정렬되기도 하고, 둥둥 거리는 K팝이 온몸을 울리기도 한다. 몇 곡이 흘러가면 익숙한 광경이 보이고, 내비게이션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나를 멈추게 하고, 불안도 정지된다.
왜일까? 늦게 집에 도착한 덕분에 집에서 먼 곳에 주차를 하고 거닐며 짧게 생각을 굴렸다. 불안은 오감을 통해 스며든다. 손에는 땀이 맺히기도 하고, 눈은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른다. 걱정해 주는 이들의 이야기는 서걱거리며 머리에 남지 않는다. 입맛은 어디로 갔는지 밥을 깨작거리게 된다. 내가 무엇을 짚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오감을 타고 들어오는 불안을 밀어내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내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큰 소리로 노래를 듣는 일인 듯하다. 노래를 켜기만 하면 된다. 감각으로 타고 오는 불안이 잠시 멈칫하게 된다. 그럼 가사에 마음을 쏟게 된다. 어떤 노래는 나에게 위로를 전하기도 하고, 어떤 노래는 자신도 그러했다고 공감을 한다. 가끔은 신나는 멜로디 뒤에 숨어있는 가사에 마음이 울렁거리기도 한다.
노래 한 곡이 여행을 보내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노래는 나를 북유럽 어딘가로 보내고, 시원한 여름 노래는 해변으로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몸을 맡기다 보면 불안과 걱정이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뒤로 물러나게 된다.
불안이 없어질까? 아니다. 걱정이 사라질까? 아니다. 그들은 쉬운 녀석들은 아니다. 하지만, 큰 노래 덕분에 그들이 오감에서 분리된다. 한 발 떨어져서 보게 되면 새롭게 보인다. 내 몸 안에 있던 걱정이 생각보다 작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내버려 두기도 한다. 가만히 두는 일 만으로도 저 절로 해결된다. 결국 내가 풀어낼 수 없는 매듭임이 밝혀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큰 음악이 무작정 커지는 불안과 걱정을 멈추게 한다. 한발 떨어져서 볼 기회를 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촉감과 시각으로 걱정을 멈추게 하는 필사가 떠오른다. 촉감, 시각, 청각으로 불안을 밀어내는 산책도 떠오른다. 미각, 촉각, 시각으로 불안을 밀어내는 친구와 하는 수다가 생각난다.
생각을 하기 위해 걸었다. 집을 한번 지나쳐 두 바퀴째 걷고 있다. 생각이 정리되니, 이제 다시 돌아갈 방향을 잡았다. 산책 덕분에 노래 덕분에 꽤 괜찮아졌다. 뾰족한 말은 생각보다 뭉툭했고, 오해하지 않도록 정교하게 이야기했더라도, 받은 사람의 해석에 달려있는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며 벗어냈다. 그들의 표정은 오직 내 덕분이 아니라 믿으며,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잊었다.
따스한 집으로 들어간다. 걱정과 불안은 다 밖에다 두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