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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Garden Jul 25. 2023

백자를 만지다.

백자를 사는 이유.

백자를 만지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가길 좋아한다. 미술 작품을 보며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이 즐겁고, 오래된 물건이 견뎌 왔을 역사를 상상하는 일이 재미있다. 글을 쓰고 나니, 정지한 순간을 잡아낸 작품을 보며 상상으로 재생해 글감을 잡아내기도 하고, 혼자 이야기를 그려내기도 한다. 김홍도의 군선도를 보며, 이들이 다음 장면에서는 어떤 자세를 취할지, 어떤 소리를 낼지 상상하며 한참을 작품 앞에 머문다.


  오랜만에 미술관으로 향했다. 도착지는 리움미술관. 더운 기운을 피해 들어간 미술관은 넓은 호텔 라운지처럼 단아하고 우아했다. 사실, 이번 미술관을 온 이유는 작품을 보는 것보다는 물건을 사는 데 있었다. 리움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가 우리 최종 목적지다.


  여자친구는 음료를 즐긴다. 술을 다양한 방법으로 만들어 마시고, 키운 바질과 방울토마토로 음료를 만들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관심이 '잔'인가 보다. 그중에 이인화, 김덕호 작가님의 '투광잔'이다. 물을 넣고 빛에 비추면 안에 보이는 투광잔.


  아래는 두텁게 만들어 안정감과 손에 쥐는 맛을 살리고, 위쪽은 음료가 은은하게 비추는 얇게 만든 백자 잔이다. 여자친구의 안목이 선택한 잔을 영상과 사진으로 자주 만났다. 실물을 보니, 도자기가 뿜어내는 묘한 빛을 멍하니 보게 된다. 여자친구는 잔에 집중해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곁에 있는 같은 작가님의 다른 잔을 보기도 했다.


  난 좋다는 동의를 하고, 곁에 있는 다른 백자를 보다, 들었다 놨다를 했다. 무척 조심스럽게. 여러 작품을 만지나 날 멈칫하게 한 작품이 있다. 전상근 작가님의 백자. 아무런 무늬도 없는 간단한 곡선만 있는 잔. 표면을 자세히 보니, 물 위에 기름기가 있는 것처럼 희미한 무늬가 보인다. 감촉은 무척 관리가 잘 된 사람의 피부를 만지듯 부드러웠다. 


  마음에 낮은 목소리가 깔린다. "아! 도자기를 사는 이유를 알았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며 만난 도자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떤 도자기는 실용성이라고는 1도 없고,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 수 조차 없으니, 내 상상력이 거기서 멈춰기 때문일 테다. 만나는 도자기는 그냥 슬쩍 보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우연하게 만진 다음에 불현듯 알게 되었다. 도자기는 쓰임이 아니라, 촉감과 시각의 만족으로 그 목적을 다했음을. 미술을 한걸음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다. 내 앞을 막고 있던 조그마한 턱을 넘어 새로운 미술의 세계로 다가간 느낌이다. 이제는 도자기를 곁에 두고 있던 누군가의 눈으로 도자기를 보게 되리라. 


  가끔 우리 곁에는 쓸모가 없는 일들이 있다. 법학, 의학, 기술, 공학처럼 우리 삶을 유지하는 일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들. 물론 우리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하고 사회가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일은 고귀한 일다. 난 이 외에 모든 일들은 왜 있나 싶었다. 마주하게 되면 그냥 지나갔다.


  도자기를 만지 듯,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알게 되었다. 그 존재 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들이 있으며, 그 일들은 그것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까지 한다는 것을. 짧은 깨달음,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고 있으니, 여자친구가 우선 작품을 쭉 둘러보자고 한다. 나갈 때, 잔을  구매하자며 나를 당긴다.


  이제는 내가 보는 눈 아니, 만지는 눈이 생겼다. 도자기에는 어떤 촉감이 있을까? 도자기를 곁에 두고 있던 안목 높은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도자기와 함께 했을까? 고대하며 전시장으로 한발 들어섰다.


(좌) 리움미술관 달항아리, (중) 김덕호, 이인화 작가님 작품 (출처: 인스타그램), (우) 리움미술관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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