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경계면, 경계인.
진수와 취역 사이
글쓰기와 책 읽기는 하나의 줄기라 한다. 글을 쓰며 자연스럽게 책을 읽게 되었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쓰게 되언다. 반복되니 아주 얇지만 조금은 넓어지는 지식이 생긴다. 지식은 단순히 지식으로 남는다면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위험한 방향으로 흐른다. 지식 뒤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일은 바로 사색이라 믿는다. 지식과 사색이 반죽하고 숙성을 하면 고소한 지혜가 되는 건 아닐까?
얇은 지식에서 자주 보게 되는 분야가 있는데, 바로 항해다. 거친 파도가 우리네 삶처럼 느끼지기도 하고, 알 수 없는 폭풍 속에 빠져 고단한 삶이 항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거대한 바다에 있는 배에 관련한 이야기는 내 마음을 자주 잡아 둔다. 이번에는 배 탄생이다.
배가 태어난 일은 우리는 '진수'라고 한다. 진수식을 거하게 한다. 새로운 선박의 탄생과 아무런 일 없이 항해하는 마음을 가득 담는다. 진수에서 여러 방법이 있다. 독*에서 물을 넣어 물에 띄운 다음 선체를 바다와 만나게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활강대'라고 하는 라인 위에서 배를 바다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 하얀 거품을 내며 자신이 오래도록 지내야 할 바다를 만난다.
*독: 건조나 수실, 혹은 짐을 적재/하역하는데 쓰이는 시설.
축복을 받는 진수식 뒤에 바로 바다로 가는 것일까? 아니다. 진수를 한 뒤에 비로소 배 심장인 엔진을 넣고, 의장(outfit)이라고 하는 설비를 설치해야 한다. 사실 진수한 배는 텅 빈 배에 가깝다. 엔진을 넣고, 의장을 모두 설치하고 나면 바로 바다로 갈 수 있을까?
아니다. 시운전을 해야 하고, 시험 항해를 하며, 예비 훈련을 해야 한다. 얇게 성명해 볼까? 시운전은 엔진을 켜보고 속도를 제대로 내는지, 운전을 원하는 방향으로 잘 되는지, 물에는 얼마나 잠겨있는지를 확인한다. 다음은 시험 항해. 진짜 바다로 조심스럽게 나가 본다. 예비 훈련은 한계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배가 잘 구동하는지 확인하는 단계라 할 수 있겠다. 모든 확인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취역이다. 현역으로 근무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우린 가끔, 아니 자주 경계에 있다. 시작을 했지만, 여전히 온전한 시작인 아닌 경계.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을 조금 고급지게 표현하자면 '경계인'이라고 해야 할까? 진수를 했지만, 아직 취역이 아닌 단계. 시운전에 문제가 보여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시험 항해 동안 물이 들어올 수도 있다. 때로는 예비 훈련 동안 한계에 다다라 고장이 날 수도 있다.
경계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니, 참 불안하다. 지금 내가 경계에서 겪는 일들보다 강하고, 센 일들이 앞에 놓일 걱정에 지금 시험에 불안한 결과를 보며 마음이 떨린다. 마음이 쪼그라들 때면, 경계에서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도 저도 아닌 경계에 서있는 경계면.
인생에 완전한 준비를 하고 난 뒤 만나는 일을 없다,라고 한다. 물론 맞다. 완전히 어디까지 인지도 모르고,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 삶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있다. 또, 마이크 타이슨이 했다고 하는 말도 떠오른다. "맞기 전까지 모두 그럴듯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 이 말은 편집된 문장이라 한다. 뒤에 따라오는 문장이 있다. "얻어맞으면 쥐처럼 공포에 떨고 얼어붙을 것이다."
난 아직 맞지도 않고, 경계에서 오지도 않은 위기에 난 쥐처럼 공포에 떤 모양이다. 완전은 아니라 하더라고 마음에 물이 세는지, 마음이 어느 정도의 속도를 감당할 수 있는지, 거친 파도에 내 마음은 잘 견디는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확인은 필요하리라. 나를 넘어선 위기가 왔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도 있고, 내가 견딜 수 있는 위험이 왔을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기준이 되리라 믿는다.
사실 우린 늘 경계에 서있는 건 아닐까? 어떤 분은 배를 만들고 있고, 어떤 분은 진수식을 끝내셨을 수도 있다. 또 어떤 분은 취역을 끝내고 세상으로 나아가고 어떤 분은 새로운 배를 만들기 위해 조선소로 들어올 수 있다. 모두 각자의 단계에서 어떤 배를 만들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난 이제 예비 항해를 준비해 거친 파도를 헤쳐 나아가보려고 한다.
모든 이들의 멋진 항해를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