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따라 걸어봅니다.
결심이 필요한 순간 그를 만나다.
책을 읽다 가끔 멈춘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검색엔진에 읽던 책의 작가이름을 넣고는 얼굴을 찾는다. 독서는 저자와 하는 대화라고 하니, 사진을 보고 책을 읽으면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흐릿하던 그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머리와 수염이 희끗희끗한 어르신이 나에게 손짓하며 여기 앉아 보라고 하신다.
글은 내면을 보여주는 일이라 한다. 거기다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하는 에세이는 말해 무얼 할까? 매일 글을 쓰는 글을 잊지 않고 읽어주시는 분들이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최근에 삶 경계에 서서 불안한 나를 찾으신 분도 있고, 새로운 도전에 떨리는 마음을 내비치는 나를 알아낸 분도 있었다. 정확하게 보셨다. 최근까지 결심이 필요한 일이 있었다.
책이, 아니 나를 앉으라고 하신 분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다리신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세요? 우선 짐부터 내려놓으시죠."
난 시계를 보고 마뜩지 않은 마음으로 앉았다. 그의 질문에 배낭이 있던 인생 가이드북과 6개월 단위로 짜인 삶 계획표를 찾아 더듬거렸다. 아뿔싸. 없다. 가방을 내려놓고는 뒤지기 시작했지만 헛수고다. 머리를 배낭에 넣고 찾다 보니, 머리에 피가 몰려 띵하다. 그의 질문도 사라지고, 답도 흩어졌다.
'난 어디로 갈려고 한 거지?'
난 삶을 치밀하게 계획하며 살았다. 몇 년 뒤에는 무엇을 하고, 그 뒤에는 어디에 서있으리라 상상하며, 촘촘하게 계획을 짰다. 환경공학을 전공으로 정하며, 환한 미래를 생각했다. 오래도록 공부하며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리라 믿었고 박사가 되었다. 그동안 열심히 한 탓일까? 바로 취직이 되었다. 한 단계 한 단계를 갈 때마다 계획표를 찢었다. 환경공학의 미래는 20년째 환하기만 하고, 박사학위는 전문성을 대변해 주는 일이 아니었으며, 직장은 녹록지 않다.
계획표를 바쁘게 새로 적었다. 인생을 안다는 분들이 써놓은 가이드북을 읽으며 안전하고 빠른 길을 지도에 적어냈다. 답이 없는 문제에도 마치 답이 있으리라 믿으며 쓱쓱 적었다.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고 가중치를 넣었다. 점수로 환산하고 결정했다. 뿌듯했고 걱정은 뒤로 숨겼다. 다시 떠나려고 했는데, 지금 계획표도, 가이드북도 사라졌다.
"계획표도, 장단점 표도, 가이드 북도 사실 의미가 없어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잠시 걷자며 자신을 따르라고 한다. 무거운 배낭을 메려고 더듬거리니, 내 손을 잡고는 두고 가자고 한다.
"그대가 적어둔 계획표, 장점과 단점이 있는 리스트는 한계가 있어요. 경제학에서는 그걸 비용-혜택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리죠."
왜냐는 말을 할 줄 알았을까? 바로 이어 나간다.
"답이 없는 문제는 보통 돌이키기 힘들 일이지요. 한번 결정을 하고 걸어 들어가고 나면 돌아올 수 없어 보이지요. 그래서 깊은 고민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 일을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했다고 한들 그 문제를 다 알 수는 없어요. 마치 작은 창문으로 그곳을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요.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는 일도 한계가 있지요. 그들이 솔직히 모든 일을 말하는 것도 미지수고, 그들의 체험과 당신의 체험이 다를 테니. 그대가 쓴 리스트도 마찬가지예요. 이미 환경공학을 선택하며 느꼈잖아요? 환한 미래가 있을 줄 알았지만, 만년 유망주인 학과, 환경공학과."
토끼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자, 이번에는 저기 다리를 건너가 보자고 하신다. 안주머니에서 낡은 종이를 하나 꺼내어 주신다. 환경공학을 정하기 전에 적었던 비용-혜택 리스트다. 보며 웃었다. 고등학생이 상상한 환경공학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봐 웃기죠? 지금 당신이 썼던 그 표도 나중이 되면 우습지 않을까요? 답이 없는 문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하고 맛보고 음미해야 할 '미스터리'라고 생각해요."
커다란 성벽의 육중한 문을 살며시 밀며 그는 내 등을 토닥이고, 따스한 말로 나를 안아준다.
"글을 쓴다고 했죠? 그럼 잘 알겠군요. 처음에 생각한 처럼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걸요. 쓰다가 꼬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며, 쓰지 못하는 글도 있잖아요? 그럼 다른 종이 꺼내서 글을 써봤죠?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답이 없는 문제도 해보면 잘못되어도 우리의 성장으로 남지 않을까 싶어요."
환한 빛이 나는 방향으로 손짓하며 가보라고 한다. 내가 가지고 있던 배낭도, 계획표도, 가이드북도 잊었다. 불안한 마음 한 조각이 있어 뒤를 돌아보니, 그가 뛰어 나에게 주머니 하나를 쥐어 준다. 읽어보라고 한다. 답이 없는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고 손을 흔들어주신다.
얼어본 주머니에는 종이 두 장이 있다.
'옳은 결정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쓰는 시간을 줄여라. 대신에 선택권을 늘리는 방법, 선택의 결과가 좋지 못할 때 실망감에 대처할 방법을 고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라.'
다른 종이에는 아래의 문장이 있다.
'인생의 어느 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위험을 감수하고 그 길을 직접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팩트가 모두 수집되는 날은 절대 오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문은 없어졌고 앉아 있던 자리에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
추천드리는 분
- 결심이 필요한 순간에 서 있는 분.
- 내가하는 결정에 의심이 드는 분.
- 결심이 어려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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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nz43iRjgCb4&t=1s
저자가 말하는 영상이 있어서 함께 올려봅니다.
세계사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