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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Garden Nov 15. 2023

화담숲이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경치 구경하시면서 천천히 산책하세요.

화담숲이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11월이 시작되고 가을 끄트머리에 섰을 때, 행운이 찾아왔다. 화담숲. 유명한 콘서트 티켓팅의 경쟁률과 비슷할 정도 치열한 다툼을 뚫고 티켓을 얻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여자친구가 가족과 함께 가려고 비장한 마음으로 예매에 나섰다. 그동안 콘서트 예매에 경험이 있는 노련한 그녀는 성공했다. 부모님에게 이 소식을 전하니, 슬픈 답만이 왔다고 한다. 여자친구 어머니는 이미 다녀오셨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지 않으니 가지 않겠다. 


  어렵게 얻게 된 티켓이 공중에 뜨게 생겼다. 마음 착한 그녀는 내게 선택권을 주었다. 난 부모님을 설득했다. 사람이 많거나, 멀면 바로 거부당할 테고, 콘텐츠가 확고하지 못하면 거절당할 테다. 비장한 각오로 멋진 사진을 휴대전화에 담고 나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단단한 각오가 무색하게 선선히 승낙하셨다. 아버지, 어머니, 나 그리고 여자친구가 한 팀이 되어 날짜를 기다렸다.


  아침에는 서늘한 기운이 존재감을 으스대지만, 낮에는 해가 추위를 물러가게 하는 화창한 날씨가 기분 좋게 했다. 늦으면 주차를 하기 어렵다는 말에 개장 전에 도착했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많은 분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종이표 대신 QR 코드를 들고 입구로 들어갔다. 


  쌀쌀하지만, 온갖 색을 담고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아버지는 나무 이름을 짚어내시고, 어머니는 붉은 단풍을 보고 걸었다. 소중한 이 시간을 담으려 여자친구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멋진 배경에 쏙 들어가 우리는 함께 얼굴을 맞대고 기록했다. 사진을 보며 웃고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부모님은 이미 저만치 앞으로 가셨다. 


화담숲 단풍


  두 번째 세 번째, 사진을 찍고 나니 이제는 시선 끝에서야 겨우 보이는 정도로 거리가 멀어졌다. 지도를 보니, 이제 막 시작 위치를 벗어난 모양이다. 지름길을 따라 후다닥 따라갔다. 의자에 앉아있는 부모님이 보였다. 물을 나눠마시다, 우리를 발견하시곤 손을 크게 흔드신다. 


  사진을 잠시 접고는 함께 보폭을 맞춰가야지 하며 걸었다. 마음에 기록하려 천천히 걸으며 화려한 색을 지긋이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다시 거리가 벌어진다. 이런 경우가 잦을까? 안내 표지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경치구경하시면서 천천히 산책하세요."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부모님을 잡고 보여드렸다. 빙그레 웃으시며, 천천히 가보자 하신다. 이제야 서로의 보폭을 맞추며 산책을 시작했다. 흘러가는 바람에 말을 나누고, 떨어진 잎을 보며 내일을 생각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생각을 증류하신 어머니가 말을 꺼내놓으신다.


  "목적지만 보고 걸어서 그래. 걸음이 바빠. 목적 없이 걷는 게 어색해. "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뒤짐 진 모습으로 반발짝 빠르게 걸어가셨다. 


  항상 바쁜 삶을 사셨을 테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난 아버지는 두 손에 쥔 것 없이 세상에 내팽개쳐진 젊은이였다. 어머니는 소중한 아버지(내게는 외할아버지)가 이 세상 소풍을 이르게 끝내시고 가신 뒤, 사는 일에 급급한 삶을 살아냈다. 두 분이 만나 내가 세상에 나왔다. 더 열심히 살았을 테다. 가진 건 젊음과 노력뿐이라 생각하며 목적지를 찍고, 바쁘게 걸었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실패를 했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부침이 있는 삶을 사는 와중에 여유라는 이름은 사치다. 걷고 또 걸었을 테다. 삶의 틈 하나 남기지 않고 걸었다. 습관은 여유를 앗아갔고, 젊음을 지불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못하며, 마치 목적지가 달아나는 냥 걸었다.


  다시 부모님을 불렀다. 바짝 옆에 붙으려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같이 걷자고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말을 꺼내려고 하니, 나무에 걸려있는 풍경이 흐르는 바람에 소리는 낸다. 어머니가 멈춰 서서 빤히 보신다. 맑은 소리는 아버지 발걸음을 돌렸다. 놓치기 전에 두 분이 멈춰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본다.


  잠시라도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하시려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다시 보폭을 맞춰 걷는다.

  

화담숲 연리지와 단품풍



오늘은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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