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이더군요.
실험실에서는 유난을 떨어야 산다.
실험을 할 때, 예민하다. 다른 말로 하면 유난을 떤다. 대학원 입학 처음엔 그러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난을 거세게 떨었다. 난 다니던 대학교에서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늘 보던 교수님, 늘 인사를 나누던 선배님들과 함께 대학원을 시작했다.
마음은 편했다. 대학교 끄트머리 4학년에는 '프로젝트'를 수강하며, 대학원에서 실험을 했다. 장소도, 사람도 익숙했다. 거기다, 옆 실험실에는 선배들이 있었지만, 내가 들어간 실험실에는 선배도 없었다. 평탄한 연구가 이어지리라 믿었다.
믿음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평화는 없었다. 다행히 동기 한 명이 있어서, 의지하며 실험했다. 겨우 연구했다. 석사 1년 차에는 실험을 실패했다. 매주 미팅을 하며, 이유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결과. 해석도 못하는 수치. 지도를 강하게(?) 받았다.
언제부터 달라졌을까? 1년이 넘어갈 때부터다.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 곧 졸업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급격하게 달라졌다기보다는 서서히 바뀌었다는 게 옳겠다. 유난을 떨며 실험을 했고, 유난을 떨며 논문을 읽으며 결과를 분석했다. 유난을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볼까?
실험을 준비할 때, 연구노트를 정말 많이 적었다. 준비하는 실험을 한 논문을 나열하고, 비교했다. 비슷한 실험을 했지만, 다른 방법을 사용한 이유를 찾아 몇 시간을 고생했다. 그렇게 연구 노트를 빼곡하게 몇 장을 쓰고 난 뒤에야 실험을 시작하려 일어났다. 곁에서 보는 이들은 답답하다 했다.
실험 기구를 깨끗하게 씻고 말린다. 이 시간도 오래 걸린다. 마치, 목욕재계 같다. 적어둔 실험방법을 되뇌며 실험을 준비한다. 이 부분에서도 유난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청결한 기구가 마련된 다음에 실험을 시작한다. 이때도 유난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실험을 시작해도 유난은 여전하다. 폐수에 있는 오염 물질을 내가 원하는 처리 방법을 적용해 얼마나 줄어드는지 관찰하는 실험이다. 이때, 시간에 따라 물질이 줄어드는데, 보통은 오염물질을 측정한다. 난 그러지 않았다. 같은 시료를 가지고 최소 3번을 측정했다.
아무리 집중해도, 통제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를 막기 위해 3번을 반복한다. 내가 측정을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실험 도구에, 실험 약품에 문제가 있는지 알게 된다. 이상하다면, 다시 한다. 비교해 정확도가 충분해야 실험을 계속한다.
결과가 나온 뒤에도 유난을 떤다. 실험 결과를 가지고, 온갖 방법으로 그래프를 만든다. 물론 시간에 따른 결과를 보긴 하지만, 다른 모양의 그래프를 그려본다. 자그마한 변화에도 이유를 찾으려, 나와 비슷한 결과를 보고 분석한 논문을 한참을 뒤진다. 그럼 연구 노트에는 보고하지 못한 무수한 그래프가 남는다.
통계를 동원한다. 복잡한 숫자에서 단순한 숫자를 뽑아내어 의미를 찾는다. 교수님께 보고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숫자는 10번 시도하면 1번 겨우 한 번 나온다. 유난을 떤다. 시간은 오래 걸린다. 그렇게 유난을 떨면 남는 게 있다.
'아! 이런 방법으로 볼 수도 있구나', '다른 실험의 결과를 볼 때 이런 방법으로 분석이 가능하겠구나.'라는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교수님이 아신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내가 이런저런 분석을 가득하고, 연구노트가 지저분해진 것을 아시는 모양이다.
이렇게 준비해도 완전치 못하다. 10개의 질문을 하시면 대략 7~8개는 내가 이미 이리저리 고민했던 것 중에 하나는 걸린다. 나머지는 2~3개는 시간이 흘러가며 줄었다. 지난 고민들이 쌓이니, 의미 있는 고민을 하는 방법을 터득한 모양이다. 안다. 내가 유난을 떠는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실험을 하는 일, 연구를 하는 일 모두에서는 유난을 떨어 준비하고, 유난을 떨며 실험을 하며, 유난을 떨며 결과를 봐야 한다.
머리가 좋으신 분은 최소한의 시간으로 길을 알아낼 테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내가 가진 대부분의 시간을 넣었다. 몸은 여기저기 아팠다. 공부에도 왕도가 없지만, 연구에도 왕도는 없다. 유난을 떨어야 한다. 그래야 험난한 실험 세계에서 탐험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