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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어떤 실험실을 가야 할까요?
"어떤 대학원, 어떤 실험실을 가야 할까요?"
박사과정 일 때는 자주 듣던 질문이다. 난 고민하지 않았다. 삼 대가 덕을 쌓았다고 할까? 난 내가 학부를 다녔던 곳에서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인격도, 학문도 모두 따를 만한 분을 만났다. 그래서 질문 없이 진학했다.
석사를 하고, 곡절이 있는 박사를 하고 있으니, 후배들이 물어본다. 우리 학교로 진학하려는 친구도, 다른 학교로 대학원을 가려는 친구도 했던 질문이다. 질문 의도로는 먼저 경험한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가려는 곳은 어떤 곳인지 궁금한 탓이리라. 아니면, 먼저 업계에 몸 담고 있으니, 당신이 보기에는 그곳은 어떤지 묻는 질문 일 수도 있다.
답이 없는 질문이다. 내 생각도 단서만 되지, 답은 아닐 테다. 많은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결정한 이들. 누군가는 무사히 졸업했고, 누군가는 중도 하차했다. 같은 실험실에 갔지만, 누구는 끝까지 갔다. 누군가는 그만두었다.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을 테다. 그들이 했던 질문과 내가 했던 말을 적어볼까?
연구 주제는 미래를 보는 일이다. 짧게는 2년이고 길게는 5년 뒤에 필요한 일을 준비한다. 그 기간 동안 석사가 탄생하고, 박사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지금 좋아 보이는 전공이 내가 졸업한 뒤에는 낡아진 경우도 있다.
나도 모른다. 나와 맞는 실험실은커녕, 나와 맞는 게 무엇인지 지금도 헤맨다. 평생을 찾아가는 일이다. 내게 꼭 맞는 실험실이란 없다고 본다. 내가 어느 정도 맞춘다는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꼭 옳은 일이 아니듯, 나와 맞지 않던 실험실이 사실 필요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맞는 실험실을 찾는 일도 어렵고, 맞다고 해도 정답은 아니다. 미안하다. 나도 모른다.
다만, 내 인격을 말살하는 점이 있다면, 맞추면 안 된다. 나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때는 단호한 결정을 있어야 한다.
난 지도교수님이라고 한다. 물론 실험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분에 한정이다. 교수님의 형태는 다양하다. 외부 일정이 많으신 분들은 학생을 보기가 어렵다. 일정 부분 실험실을 관리하는 분들이 있다. 연구교수가 될 수도 있고, 박사 후 연구원일 수도 있다. 이들이 실험실 분위기를 지배한다. 연구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실험실 분위기가 너무 엄혹하면 연구하는 일지 쉽지 않을 테다.
우리가 잘 모르는 연구는 배우며 할 수 있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반면에 질문하기도 어렵고, 실험하는 일도 눈치를 봐야 하는 실험실이라면 정말 실험에 집중할 수 있을까? 몸도 힘든 실험실에서 마음마저 힘들면 지옥이다. 그래서 난 연구 주제보다, 교수님의 실적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문장은 다르지만, 논지는 이 질문이다. 내가 아는 한 최선을 다하고, 내가 아는 한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답을 한다. 하지만, 답을 알 수가 없다. 내가 해준 말도 그들에게는 작은 창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알 수가 없다. 작은 창으로 담을 수 없는 부분은 자신이 체험을 해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시간마다 같은 장소라도 다른 경험을 하니, 내가 하는 말은 사실 큰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질문과 답을 오가며, 대화 끄트머리에 다다르면 꼭 하는 말이 있다. 직접 체험해 보라고. 대학원에는 학부연구생이라는 제도를 쓴다. 학부생이 와서 연구를 돕거나, 공부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준다. 누군가에게 묻고 답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분위기를 알 수가 있다. 그 정도는 해야 한다. 내 인생을 짧게는 2년 길게는 7~8년간 삶을 맡겨야 하는 자리다. 그것도 직접. 남이 해줄 수가 없다.
긴 글을 썼다. 이까지 읽었다면, 대학원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 할 수 있겠다. 명징한 답을 남지기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내 삶을 거는 일이라, 타인에게 확실한 답을 얻는 일은 어렵다. 체험하라,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어려운 점을 대가로 지불할 각오로 하자.
연구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