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상황 그거 자체가 가난이에요."
돈만이 가난을 말하는 기준은 아니다.
생생한 기억이 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지금은 거의 없어진 유선 전화가 집에 있던 시설이다. 아버지는 타지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부업을 하셨다. 부업이 무엇인 줄 아실까? 그릇에 패턴을 붙이거나, 화장품 담는 박스를 접거나, 우산의 끝 부분을 돌려 끼우기도 하고, 인형의 눈을 붙이기도 한다. 하나 하면 몇 십원 정도 받을 수 있는 일거리다.
아버지는 노력한 만큼 벌이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일도 못하시는 처지셨다. 집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어머니는 나가서 일을 하려고 해도, 어린 나를 집에 혼자 두는 일이 쉽지 않은 탓에 할 수 있는 일이 부업이었다. 물량이 계속 있는 건 아니다. 한동안 부업이 없으면 돈을 떨어지고, 쌀독이 말 그대로 텅텅 비게 되는 날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리다고 모르는 건 아니다. 가난이라는 학교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 입학하면 철은 빨리 든다. 어머니에게 여쭤보니 먹을 것 없던 날이 잦아서 그런지 특별한 일화로 기억에 남지는 않으셨던 일 같다. 그때 그 장면에 내게는 생생하다.
삼양라면을 부신다. 네 조각을 내고 위아래를 분리하면 총 8조각이 나온다. 수프를 권량 용량을 두 배가 넘는 물을 큰 냄비에 넣고 끓인다. 어린 자식에게 너무 자극적인 맛을 보이기는 싫으셨던 건지, 계속 끓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 끼에 어린아이 한 명과 이제 30대 중반을 지난 여자가 두 조각을 넣고 지켜본다. 물을 한 껏 흡수해 팅팅 풀어 터지기 직전까지 간다. 그럼 모자의 식사가 시작된다. 하루에 두 끼 그럼 라면 하나로 2일을 먹을 수 있다.
그렇게 몇 차례 먹고 나서, 어머니는 밖으로 일을 하러 가셨다.
지금 보면 어려웠던 시간이다. 이제 내 나이 밖에 안 된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고 마음에 사무치는 일인지 짐작도 못하겠다. 지금 보니 그렇다. 그때 나는? 아름답다고 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가난이 싫고, 슬프고, 분노의 감정은 한 톨도 있지 않다. 왜? 왜일까?
장면은 떠오르고 이유를 모르던 차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가 답을 알려줬다. 힘겨운 순간을 견디는 20대.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다행이고, 식단 균형을 맞추는 일은 사치인 이들을 그린다. 보고 있으니 생생하던 나만의 기억이 더 진했다. 다큐멘터리 마지막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저도 처음에는 가난, 부자 이런 게 돈에만 연관되어 있는 건 줄 알았거든요."
"불행한 가정환경도 가난이에요. 환경과 상황 그거 자체가 가난이에요."
다큐멘터리에서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텅 빈 방.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죽일 듯 소리 지르고는 집. 상황도 환경도 모두 가난에 포함된다고 한다. 맞다. 그때, 내 기억에 가난에 대한 분노, 슬픔이 한 톨도 없었던 이유는 바로 부모님 덕분이라는 사실이다.
라면을 같이 끓이며,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다며 웃으며 이야기를 하던 어머니. 먹고 나서도 우리는 또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있다며 웃음 짓는 어머니. 따스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니가 계셨기에 난 그 순간을 그 장면을 가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큐멘터리가 계속 생각을 부유케 한다. 그때 어머니가 내게 심어준 장면들도 떠올랐다. 지금 내 나이뿐이었던 어머니는 내게 가난을 견디며, 가난이라는 흔적을 내게는 남겨주지 않도록 화목한 환경을 만들려고 애쓴 노력이 보인다. 글을 쓰고 퇴고하며 마음이 울렁거린다.
가난은 돈만 말하는 건 아니다. 환경으로, 태도로, 상황으로 가난을 덜어낼 수 도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나는 부모님이 만드셨다.
참고자료
- 영양불균형의 새로운 사각지대 저소득층 20대 1인가구, 통장 잔고에 따라 달라지는 식사 메뉴. 20대 청년들에게 가난은 어떤 의미일까│휴먼다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