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회사에 던져놓고 오는 일
사실 우리는 매일 아침 침대에서
대단한 결심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오늘도 무사히 출근한 당신!
칭찬하고, 응원합니다.
학창 시절 아침마다 누가 큰딸을 깨울 것인가 하는 문제로 부모님이 투닥거리실 정도로 나는 아침잠이 많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등교 시간이 빨라지자, 아빠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셨다. 소용없는 알람 대신 중학교 기술 시간에 납땜 실습으로 만든 조잡한 초인종을 어디선가 찾아내신 것이다. 아침마다 아빠가 누르던 그 초인종의 아름답지 못한 전자음은 정말 끔찍했다. 어느 날엔가 동생과 합세하여 몰래 고장 내버렸다.
대학 생활로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혼자 일어나는 일은 조금씩 익숙해졌다. 하지만 출근은 등교와는 수준이 다른 부담이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에 절대 지각이란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알람을 몇 개씩 맞춰두고도 불안해서,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을 잤다. 자다가 중간에 얼핏 깨어도 이불 어딘가에 묻힌 핸드폰을 찾아 다시 손에 쥐었다. 진동은 소리보다 잠을 깨우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던 사회 초년생 시절엔 일단 아침에 제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늦게 일어나 젖은 머리 날리며 전력 질주로 지하철역으로 달려가도, 지각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늦잠 걱정만 했지, 아침에 눈 떠서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던 시절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나는 출근에 대단한 결심이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를 너무 괴롭게 하는 상사와 일할 때였다. 일에서는 참 손발이 잘 맞았음에도, 업무지시 외 모든 발언이 팀 동료에 대한 험담이라는 점이 나를 괴롭게 했었다. 나를 인정하고 키워준 고마운 상사였음에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때는 직장생활에서 느끼는 괴로움이 내 하루를 꽉 채우는 것이 너무 억울해 늦게 퇴근해도 일찍 잠들지 못했다. 매일 밤 괜히 관심도 없는 예능을 켜두고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늦게 잠들어도, 기이할 정도로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는 것이다.
그토록 아침잠이 많았던 내가 알람도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저 출근 준비를 시작하는데 너무도 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새벽 네다섯 시에 깨기도 해서 회사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뒹굴거렸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회사에 안 갈 핑계가 없을까?’하는, 한 번도 답을 찾지 못한 하릴없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보내다, 진짜 지각이겠다 싶은 시간에야 부랴부랴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 시간도 지나가고, 업무도 동료들도 익숙해지고 나자 회사가 이사를 했다. 출퇴근에 지옥 같은 환승구간을 통과해야 했다. 사람들을 밀치지 않으면 지하철을 탈 수 없었다. 평소 오감이 지나치게 예민한 내게 만원 지하철은 내게 정말 지옥 같은 곳이었다. 출근할 때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샤워를 하는 것 같았다. 요리조리 사람들을 피하고, 최대한 지하철 문이나 벽에 붙어 안정을 찾아도 마치 두꺼운 외투를 입고 사우나를 하는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었다.
어느 여름날에는 땀에 젖은 타인과 신체가 접촉되는 느낌, 그 땀 냄새들, 대화 소리 등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든 것들이 유독 괴롭고, 심지어 타인의 숨소리조차 참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욕실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평소 퇴근이 나보다 늦던 남편이 그날따라 외근 후에 일찍 퇴근하는 바람에 내가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날 남편은 너무 놀란 것 같았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는지, 무조건 당장 차를 사자고 했다.
출근길의 교통체증과 주차 문제, 유지 비용 등 여러 이유로 자차 출퇴근은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내가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너무 예민하고 유별나다고 자신을 탓하기만 했지,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문제는 나의 퇴사 결심을 앞당겼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회사를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히며 다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출근이 힘든 이유는 이렇게 다양하다. 단순하기도, 때로는 복잡하기도, 어떤 면에서는 절박하기도 하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일단 나를 회사에 데려다만 놓으면, 마치 변신이라도 하듯 내 몸이 알아서 일을 해냈다. 새벽 내내 ‘팀장 얼굴 보기 싫다, 목소리 듣기 싫다!’라는 생각만 했어도, 회사에 가면 멀쩡한 얼굴로 회의를 할 수 있었다. 밤새 열감기로 앓고 휴가를 내야 하나 망설였어도, 출근만 하면 멀쩡해져서 동료들은 내가 아픈 줄도 몰랐다. 시작이 반이라는 옛 조상님들의 말씀은 그 지혜가 얼마나 감탄스러운지.
직장인이었던 나는 이상하게 업무시간에만 반짝 힘이 나는 게 타고난 노예의 바이오리듬이라며 푸념했었다. 녹초가 되어 퇴근하고 오늘은 정말 휴가를 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도, 결국 내일도 출근할 나를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백수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몸은 억지로 버틴 것이 아니라, 아마 회사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출근하면 그 즐거움에 겨운 직장인이 짜잔 하고 등장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비슷한 경험을 해 왔는지도 모른다. 유치원 가기 싫다고, 학교 가기 싫다고 엄살을 피우다가도 집을 나서면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결국엔 웃으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이 각각의 자아로 느껴질 때가 있다. 게으르고 내향적인 백수인 나도 있지만, 엄청난 추진력과 사교성으로 인정받던 직장인인 나도 있었던 것처럼.
때로는 다른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기도 하다.
아침이 오면 직장인인 나를 회사에 던져놓고 오자.
그 뒤의 일은 직장인인 내가 알아서, 기꺼이, 또 가끔은 즐겁게 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