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값이 나의 값은 아닙니다.

by 뭇별

나에겐, 이력서엔 적기 애매한

특이 이력이 하나 있다.

나름 여러 지역의 대중목욕탕을 꿰고 있다는 것.


직업 특성상 장기 출장이 잦다 보니

수도권의 중견기업스러운 사우나부터

락카에서 오래된 나무냄새가 나는 충청도 읍내의 목욕탕까지,

출장지와 겹친다면 근방에 있는 사우나에 꼭 가보곤 한다.


뜨거운 탕에 몸을 밀어 넣으면

빳빳하게 굳어있던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렇게 흐물흐물해질 때쯤,

냉탕으로 옮겨 찬물에 머리까지 담글 때 복잡했던 머릿속이 딱! 하고 정리되는 기분이 좋았다.


처음엔 그저 찌뿌둥해 피로를 풀려 들렀던 것이 예상치 못한 힐링이 됐는가,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방문한다.

그러다 아내가 사준 목욕바구니라는 아이템을 장착한 뒤부턴 진정한 목욕인으로 거듭나게 됐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직 익숙지 않은 동네의 목욕탕에 앉아

요즘 날 괴롭히는 걱정들을 하나둘 떠올리다 보니,

뜨거운 열기 사이로 '선빵'의 추억이 떠오른다.


내 초딩 시절 첫 '맞짱'은

예상치 못한 순간, 운명처럼 찾아왔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 책가방을 내려놓기도 전,

우리 반에 들어와 친구들을 은근슬쩍 괴롭히며 으스대던 옆 반 아이를 보게 된다.


녀석은 덩치가 컸다.

키 순으론 뒤에서 1,2등을 다퉈 맨 앞줄에 배정받은 나에 비해

맨 뒷자리를 배정받았을게 당연했던 녀석.


내 안의 흑염룡이 갑자기 발동을 한 건지,

내가 놀던 놀이터에선 덩치로 서열을 정하는 일은 없어서였던건지,

그것도 아니면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었던건지.


제대로 된 주먹다짐 한번 해본적 없던 나는

그날따라 이상하게 정의의 사도로 빙의해

녀석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


“너 뭔데 우리 반에 와서 까불어?”


녀석은 나를 내려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다.

“너는 뭔데?”


하는 답변이 돌아오는 순간


나는 일발 장전 해둔 작은 주먹으로

녀석의 머리통에 냅다 꿀밤을 날린다.


?


다짜고짜 날아온 선빵에 당황했는지

녀석은 그대로 제 반으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싸움이라기엔 다소 허무하게 끝나버린 첫 맞짱이었지만

다음 전개는 또 한 번 예상을 빗나간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했던가,


그날 이후 이상하게 서로 통하는 구석이 생겼는지

우리는 피아노 학원도, 하교 후 축구도 함께하는 단짝이 됐다.


알고 보니 그 녀석은 불량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친구들이 무서워하던, 지금으로 치면 소위 '학교 짱'같은 친구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녀석의 덩치는 더 커졌다.

학년이 올라가도 여전히 맨 앞줄에 배정받는 나를 무시하려던 친구나 동생이 나타나면

녀석이 대신 나서 주기도 했다.


만약 그날, 녀석이 학교 짱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친구들이 그 녀석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같은, 그 공포치의 평균값에 젖어 있었다면

나는 감히 그 정수리에 냅다 주먹을 꽂을 수 있었을까?

녀석은 나의 단짝이자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살아가며 세상이 정해놓은 '평균값'에 지레 겁을 먹곤 한다.

"이 병은 고치기 어렵다더라", "이 일은 성공 확률이 좀 희박하다더라" 같은 남들의 데이터들이

때로는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내 가능성을 가둬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평균값 혹은 보편값일 뿐, 나의 값은 아니다.

쫄아 있으면 나한테 올 생각도 없던 깡패한테 미리 지갑을 주게 된다.


다시 목욕탕.


온탕 안에 몸을 밀어 넣고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서 질서를 지키듯

나를 괴롭히는 걱정들이 또다시 공포치의 평균값을 학습시키려 든다.


타당해서 반박하기 애매한 평균값 앞에

기세 좋던 그날의 초딩을 소환한다.



일단 냅다 꿀밤 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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