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호르몬이 다정을 압수한다.

by 뭇별

일요일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아니고

일요일은 내가 커피 배달원!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누군가에겐 평화로운 휴일이지만, 수년째 주 5일을 외치는 나에겐 당연한 근무일.


사무실의 적정 데시벨을 깨고 상사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찾는다.

난 즉시 각 잡힌 이등병으로 돌아간다.


"제가 다녀올게요!"

기다렸다는 듯 운동화로 갈아 신으며 대답한다.


왜 배달시키지 않고 직접 가냐는 물음에

배달비를 아끼겠다는 합리적인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이건 합법적인 농땡이이자 일요일의 자유를 향한 발버둥.


가벼운 발걸음으로 일부러 한 바퀴 뺑 돌아간다.

이어폰을 꽂고 걷다 보면 금세 카페 문 앞이다.


밖은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더운 공기가 얼굴을 덮치고 안경이 허예진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많은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주말 오후스러운 풍경.


안경을 닦고 기분 좋게 온기를 느끼며

느긋하게 키오스크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나에게 보낸 카톡을 연다.

핫초코 하나, 아이스아메리카노 둘, 뜨거운 라테 하나.

버벅거리다간 아재로 보이기 십상이니 빛의 속도로 주문을 마친다.


대기 번호 363번. 앞에 10명도 넘게 남았다.

오히려 좋다. 농땡이가 길어지니까.


빈 의자는 없으니

카페 텀블러도 구경하고 지인들 프사도 눌러보며 여유를 부린다.

'363번은 진짜 오늘 내가 363번째 손님이라는 건가?

그럼 하루 매출이 얼마라는 소리지?' 하는 의문도 품어본다.

금방 10분이 지난다.

여유롭고 즐겁다.


그렇게 10분이 더 흐른다.

음.. 쌔하다.


두꺼운 패딩 안쪽으로 열기가 느껴지더니

등줄기를 따라 땀이 한 방울 흐른다.


분명 1분 전까지만 해도 따뜻해서 좋았는데,

갑자기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나를 공격하는 것 같다.


"아니, 커피가 왜 이렇게 안 나와?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렇지.
이건 너무 느린 거 아냐?"



찝찝함이 짜증이 되는 건 찰나.

애먼 직원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정교하게 '항의 계획'을 세운다.


이번 꺼 안 나오면 항의할 거야.

이번 꺼는 진짜 안 나오면 항의한다.

아씨 뭐 하는 거야 진짜 이번에 내 거 아니면 항의한다.


"363번 고객님 ~"

계획만 세우다 보니 마침내 내 번호가 불린다.






"아, 살 것 같다!"


커피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땀과 함께 짜증이 증발한다.


짜증이 증발한 자리로, 양심 비스무레한 무언가가 묻는다.


노려봤던 애먼 직원분께 한마디?

>> ......

패딩을 벗었으면 되잖아?

>> ......


우리의 인격은 쾌적한 온도와 적당한 혈당 수치 위에서만 간신히 작동하는 유리 성인 듯하다.

하루 내내 다정을 다짐해도



몸이 한계를 느끼는 그 순간
'호르몬'은 가차 없이 다정함을 압수한다.



때론 패딩 하나만 벗으면 될 정도로도 충분한 걸 보면

다정함을 지키는 방법이 거창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그러니 예고 없이 훅 치고 올라오는 짜증의 원인이

호르몬 때문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내 성격은 못 고쳐도

당장 패딩 지퍼 하나만 내리면 된다는 사실을 배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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