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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Nov 09. 2020

시작의 의미

각자의 시계가 다르듯 시작도 모두 다르다

시작 :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또는 그 단계.


 길지 않은 살아온 날들과 무수한 선택의 시간 속에서 '시작'은 숨 쉬듯 쉬운 일이기도 했다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이기도 했다.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은 꼭 다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선뜻 도전했고, 남들이 전전긍긍하는 문제를 3초도 안 되어 결정해 버리곤 했다. 반대로 시작에 앞서 준비하는 데에 하릴없이 시간을 쓸어 보내기도 했고, 쉬운 일을 결정하는 것에 주춤거리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시작의 의미는 다르고, 발을 내딛는 용기도 주어지는 상황마다 다를 테니 당연한 이치겠지.


 나는 좀 특이했다. 시작은 쉽지만 마무리에 깊이가 없었다. 일을 벌이기는 곧 잘했지만, 그 일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재주가 없었다. 블로그도 잠깐 운영하다 그만, 다시 포스팅을 몇 개 하다가 그만, SNS 글 계정도 몇 개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만, 동영상 편집도 몇 개월에 하나... 그나마 오래 지속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은 다이어리에 일기 쓰기, 마음이 복잡할 때 메모 같은 짧은 글 남기기 정도였다. 내 글의 역사는 꽤 길다.





 초등학교 6학년, 아직도 그 얼굴이 선명히 기억나는 담임선생님은 그 해 우리 학교로 처음 부임하셨다. 초등학교의 교실 환경과 생활은 오롯이 담임선생님의 영역이다. 우리 반이 다른 반과 아주 크게 달랐던 점은 식물을 기르고 매일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기억 속 제대로 된 글쓰기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짧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고 하면 보통 시를 떠올린다. 하지만 시는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이다. 요즘 SNS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감성 시를 떠올리면 오산이다. 시 한 편에는 운율을 비롯한 체계와 교훈이 담겨있다. 정해진 틀 안에 간결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녹여내야 한다.

 그래서 초등학생의 글쓰기는 노트 반 페이지 분량으로, 학교 건물 뒤편에서 각자 키우던 식물에 대해 쓰는 글에서 시작했다. 일기를 격일로 써내는 건 기본이었다. 조금씩 글의 길이가 길어졌고, 한 페이지도 거뜬히 써낼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 글쓰기는 내겐 뗄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 까먹지 않는 한 일기를 썼고, 마음이 힘들 때는 그 심정을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 글에 마음을 풀어내는 일에 서툴렀기에ㅡ지금도 완벽히 마음을 담아내지는 못 한다ㅡ 명언을 수집하는 취미도 있었다.

 그 덕분인지 만점을 받지는 못 해도 숙제나 시험으로 주어지는 작문을 어렵지 않게 해 내었고, 중학교 때 백일장 대회에서는 작지만 상금도 탔다. 처음 내 손으로 돈을 버는 경험이었다, 심지어 내가 쓴 글이 벌어준. 내 글이 인정받는다고 느꼈던 그 날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나는 문학도가 되었을까? 문과로 진학해 글을 쓰는 직업을 가졌을까?

문과로 진학을 희망했으나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회유 같은 권유로 이과에 진학했고, 공학도가 되었다.


 선택의 순간에 외압은 없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선택의 순간마다 고민했고, 결정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걷는 길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 모습에 꽤 만족한다. 공학도가 된다고 글쓰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흥미로운 책은 단숨에 읽어 버리고, 하루하루의 나를 기록하며,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연습을 한다.


 막연하게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 이야기를 쓰고 싶어'라고 가지고 있던 꿈을 현실로 마음먹게 한 건 김초엽 작가님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소설책을 읽고 나서다. SF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야기에 빠져 호로록 읽어냈고,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을 글에 담고, 내 글로 단 한 사람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을 의심하느라 허황된 꿈으로만 간직하던 '출판'의 목표를 제대로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제 시작. 첫 장이다.


 첫 장에 무슨 내용을 적어야 할까, 어떤 가닥으로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까, 고민만 수개월째. 시작은 확고했으나 끝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니, 첫 발을 내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민이 반복된다고 답이 나올 리 없는 법. 일단 쓰기로 했다. 생각나는 내용을 꾸준히 적다 보면, 하나로 엮어지는 이야기가 책이 되어 줄 것이다.






 아직 내게 세상은 어렵다. 때때로 내 안의 감정들조차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하나씩 정립하면서 나의 세계를 세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내 안의 '시작'의 의미는,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시작 : 훗날의 내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는 최선의 선택.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일단 시작하고, 벽에 부딪힐 때 다시 고민하면 된다. 여기에서 그만둘지, 잠깐 쉬어갈지, 아니면 벽을 넘어 더 걸어 볼 것인지. 시작이 어려운 이유는 용기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시작이 어렵지 않을 용기는 주변의 스치는 말 한마디였다. 내 시작을 응원한 주변 누군가처럼, 당신의 시작을 응원한다. 지금이 아니면 시작도 못 할지 모르는데, 단 한 톨의 무엇도 남지 않는 것보다 시작의 흔적이라도 남기는 게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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