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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Oct 19. 2021

오늘, 이곳엔 가을비가 내립니다


  

 정신을 어디에 던져두고 사는지 아이의 학원 보강을 완전히 까먹고 집에서 뒹굴거리며 놀던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연락에 부랴부랴 아이를 보내고 진이 빠져 잠시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 부슬부슬 비는 내리기 시작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에잇, 오늘 저녁은 사 먹자! 재빠르게 결정 후 반찬가게로 향한다. 새로운 메뉴를 사볼까 살짝 고민하다 결국 늘 먹던 몇 가지를 골라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서 돌아가 냉장고에 반찬을 정리해 두고, 발 디딜 틈 없이 난장판인 거실을 정리하고, 다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다녀오면 바로 샤워를 하고 이어서 저녁 준비를 해야지. 엄마의 머릿속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하나의 미션이 끝나면 바로 그다음 미션 스타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집안일의 연속이다. 조급해진 마음에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데, 순간 장대비가 마구 쏟아진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이 즈음 내리는 비는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반가운 비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계절이 오고 있다.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비염으로 아침저녁으로 재채기와 콧물 범벅이 되겠지만, 바뀌는 공기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가을. 비는 점점 거세지고 나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근처 놀이터에 있는 지붕이 연결된 벤치를 찾았다. 어쩐지 바로 집에 가기 싫어졌다. 내게 잠시 틈 하나를 내어주고 싶었다. 좋아하는 계절이 바로 코앞에 다가오고 있는데 이대로 돌아가 바둥거리며 집안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나뭇잎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는 것만으로 기쁘다. 또도독 똑똑 부딪치는 곳마다 모두 다른 소리가 난다. 엄마, 비가 노래를 부르나 봐. 아이가 이 빗소리를 들었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가방 안에 담긴 반찬들이 슬슬 걱정이 되지만 이 순간,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그대로 있기로 한다.

 이따금 비 오는 소리가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일부러 ASMR을 찾아 틀어놓고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비는 점점 차올라 순식간에 방 안을 커다란 바다로 만든다. 빗소리를 들으며 물속을 부유하는 듯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지금 내가 듣는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흐르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날것의 소리다.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질수록 소리는 두꺼워지고 사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다양해진다.

    


 내 옆으로 벤치가 연이어 놓여 있었는데, 두 칸 넘어 한 자리에 지나가던 아저씨가 앉아 휴대폰으로 무얼 보는지 한참을 낄낄거린다. 세상엔 재밌는 게 넘쳐나지. 나도 사는 게 즐거워 미치겠는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웬만한 일엔 큰 감흥이 일지 않는다. 최근에 가장 재밌게 본 드라마는 뭐였더라. 책은? 음악은? 순수하게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기쁨을 느낀 지 까마득하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비어 있는 벤치로 할머니 한분이 짐을 잔뜩 어깨에 메고 들어와 앉는다. 우산을 잊었는지 교복 입은 학생 한 명도 정신없이 벤치로 뛰어든다. 우리는 마치 비를 피하러 날아든 몇 마리의 새처럼, 자신의 자리를 하나씩 잡아 하염없이 내리는 빗속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가끔은 이런 종류의 쉼도 필요하지 않을까.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몸을 조용히 양옆으로 흔들며 나에게 짧은 시간을 선물한다.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 작은 산에 오르거나 마음에 드는 길을 산책하는 것 말고 다른 종류의 위로이자 비움의 시간이다. 듣던 노래가 끝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우산을 펴고 빗속을 지나야지,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스니커즈는 있는 대로 젖어 이미 양말까지 척척하다. 돌아가는 길, 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일부러 첨벙 밟으며 걸어간다. 내 마음 어딘가에 살고 있는 작은 아이는 때때로 이렇게 불쑥 얼굴을 내민다. 덕분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발걸음이 한층 가볍다.

     


“엄마, 발이 왜 이래?”

“아아, 웅덩이만 골라서 밟으면서 왔지.”

“엄마만 재밌는 거 했네, 나도 밟을래!”

“그래, 신나게 놀고 들어가서 기분 좋게 씻자.”

    


 아이와 나는 사이좋게 웅덩이를 밟으며 집으로 향했다. 우리의 옆으로 우산을 던진 아이들이 우와아아 소리 지르며 빗속을 뛰어간다. 이 비가 그치면 새로운 계절이 오겠지. 오늘 내가 찾아낸 행복한 마음에 동동 떠다니며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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