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나의 할머니

by 현수진


생각해 보면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언제나 할머니와 함께였다. 우리 집은 사촌과 할머니 집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집 세 개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대가족이었다. 맞벌이로 바쁘셨던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는 나와 동생을 살뜰히 돌봐주셨다. 방랑자 같은 삶을 사는 할아버지의 도움이나 경제적 지원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삼 형제를 홀로 키우고 손자들까지 돌보면서도 부지런히 귤 농사를 지었다. 그 돈으로 과자도 사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집안의 제사도 도맡아 지내셨다. 한 집안의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였다. 생활력 강하고 쩌렁쩌렁한 기운을 가진 강인한 사람이었다.



꼬꼬마 시절의 나는 할머니 집 곳곳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아이의 하루는 대체로 바쁘고 분주했으나 또 어떤 날은 더없이 지루했다. 무료해지면 할머니 집으로 달려가 이곳저곳을 열어 보았다. 할머니의 부엌과 냉장고, 화장대, 옷장 서랍 그 모든 곳이 미지의 세계였다. 그중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냉장고 한편에 늘 존재하던 노란색 물, 바로 게토레이였다. 이온음료의 존재를 알지 못하던 아이에게 물보다 달근하고 시원한 그 주스를 마시는 일은 일종의 일탈이었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발끝을 들고 부엌 쪽문을 열어 몰래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할머니 집에서만 마실 수 있는 그 달콤한 주스를 몰래 벌컥벌컥 마시고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아마도 알고 계셨겠지. 언제나 줄어들지 않고 가득 차 있는 게토레이를 내가 달게 마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할머니의 사랑이었을 테니까.

다정한 말투를 지닌 분은 아니었지만 우리를 사랑함은 분명했다.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 자주 올려져 있던 커다란 냄비. 나는 할머니의 미역국을 좋아했다. 전복, 성게, 생선, 소고기 등 미역국 속의 재료는 무궁무진했다. 종종 미역국을 양껏 끓여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따끈한 상태로 냄비 위에 올려 두었다. 나와 동생은 동네를 쏘다니며 뛰어놀다 배가 고파지면 부엌으로 달려와 미역국을 호로록호로록 맛나게도 먹었다. 늦은 밤에나 만날 수 있었던 부모님의 부재에도 우리가 사랑을 배우고, 따듯한 마음을 품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추억들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의 이혼 후, 아빠와 동생, 나, 할머니는 오래된 빌라의 작은 공간으로 이사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모든 짐을 버리고, 차마 버릴 수 없는 것들은 일단 사촌 집 창고에 넣어두었다. 트럭 앞칸에 끼여서 우리의 오래된 보금자리를 떠나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가족의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할머니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아빠는 말이 없었고 우리는 멀어져 가는 집만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할머니는 급속도로 쇠약해져 갔다. 신부전증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이부자리 옆에는 약봉지가 늘어갔고, 꼬박꼬박 병원에 다녀야 했으며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더 이상 농사를 짓거나 우리를 돌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더없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자취를 시작하고, 두어 달에 한 번쯤 가족을 보러 올 때면 할머니는 늘 깊고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이혼이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어떤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아주 쉽게 자책하고 자신을 미워하곤 하니까. 다시 자취방으로 도망치듯 돌아가는 나를 배웅하러 할머니는 꼭 문 앞까지 나오곤 했다. 허연 얼굴의 핼쑥해진 할머니가 기운 없는 팔을 겨우 들고 내 손을 잡는다.

우리 수진이 용기 잃지 말아요.
씩씩하게 살아야 해, 씩씩하게.


그 말이 어찌나 듣기 싫었는지. 할머니의 몸 아무 곳이나 누르면 바로 나올법한, 마치 녹음된 음성 같은 그 말이 싫어 점점 집에 오는 발길이 뜸해졌다. 어린 시절이었다. 스무 살이 되었다고 땡 하고 바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나에게 남은 용기 같은 건 없었고, 그저 분노와 화로 가득 차 있었으니 할머니의 마음이 나에게 와닿을 리 만무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도 벅차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부러 정신없이 살았다. 집에 가지 않아도 아주 가끔, 할머니의 그 허연 얼굴과 목소리가 맴돌았다. 묘한 단호함과, 어쩐지 유언같이 들리는 말이었다. 자주 못 보는 손녀에게 그 말을 꼭 남겨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만날 때마다 반복해서 나에게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막연히 생각만 할 뿐이었다.




할머니의 상태는 좋았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몰라보게 생기 있던 날이 있는가 하면, 다시 무기력한 상태로 누워있는 날도 많았다. 직접 올 수는 없었으나 나와 동생의 결혼까지 살아계셨으니 병의 고통에도 오래 버티셨다 생각한다. 동생이 아빠와 함께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다. 나는 먼 곳에서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고, 전화를 받고 그제야 밀린 후회와 미안함을 쏟으며 엉엉 울었다. 마지막 말은 고맙다 였다. 장성한 손자가 자신의 마지막에 할 수 있는 모든 의료적 조치를 한 것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꽤 오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내 손을 붙잡고, 가뿐 숨을 내뱉으며 건네던 말.


'수진아, 용기 잃지 말고 씩씩하게.'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뭉근해지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 말에 담긴 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나의 엄마가 할머니가 된 모습을 통해 저절로 이해되었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할머니는 나에게 매 순간 사랑을 주었다. 그 사랑은 흐르고 흘러 나의 아이에게 머물고, 또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흐를 것이다. 슬픔과 절망 사이에 언제나 분명하고 따뜻한 사랑이 존재했으므로 오늘의 내가 있음을 이제는 안다.


할머니, 나의 할머니. 저는 용기를 잃지 않고 씩씩하게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어요. 저의 마음 곳곳에 따뜻한 사랑을 남겨주셔서 고마워요. 언젠가 나의 아이의 손을 잡고 할머니를 만나러 가게 되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너무나 고맙다고. 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마지막까지 차고 넘치게 솟아날 샘물 같은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셔서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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