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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Sep 22. 2023

편견에 지지 않고

   

   넓은 창 너머 요란한 뽀글 머리를 한 할머니 무리가 보인다. 카페 바로 옆 맛집으로 소문난 국밥집을 향해 오는 줄 알았다. 문을 열고 위풍당당하게 들어서는 네 명의 할머니들을 보며 머쓱했다. 그녀들의 행선지가 당연히 국밥집이라 생각한 것은 완벽한 편견이었다. 할머니들은 망설임 없이 카운터로 향했다. 뭐 마실 거여. 나는 핫.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당연히 아메리카노지. 사장님, 아메리카노 핫으로 세 개, 아이스로 한 개. 아이스는 좀 연하게 해 주세요, 사장님. 계산은 카드로 할 건데, 여기 넣으면 되나? 나 이거는 잘 몰라, 사장님이 알아서 계산하고 카드만 주셔. 어이, 자리는 어디로 가? 어, 거기 좋네 좋아.     

   

   왁자지껄 메뉴를 주문하며 나누는 대화에 놀랐다. 한두 번 주문해 본 솜씨가 아니다. 믹스커피 같은 달달한 커피를 마실 거라 생각한 것은 두 번째 편견이었다. 장미꽃무늬와 체스판 패턴의 스카프, 빨강과 주황의 콜라보가 눈에 띄는 조끼, 자줏빛 립스틱 색의 점퍼. 개성으로 중무장한 그녀들은 카운터 옆에 모여 앉았다. 옷과 신발, 가방은 제각각인데 뽀글거리는 헤어스타일은 네 명이 똑같았다. 마치 자매 같은 느낌이랄까.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쳤다. 후다닥 책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저는 할머니들이 당연히 국밥집에 갈 줄 알았어요. 커피 주문도 이렇게 잘할 줄 몰랐다니까요. 편견이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부끄러워요. 그나저나 할머니들, 너무 귀엽네요.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책 뒤에서 실실 웃었다.     

   

   둘씩 마주 앉은 할머니들은 음미하듯 커피를 마셨다. 한 명이 부스럭거리며 과일이 담긴 락앤락 통을 꺼내 뚜껑을 연다. 과일을 오물거리고 커피를 홀짝이던 그녀들은 쉬지 않고 깔깔 웃었다. 밝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졌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행복이 잔뜩 묻어나는 웃음소리. 나도 만나면 저렇게 웃게 되는 사람들이 있지. 몇 명의 얼굴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마음 맞는 사람 두어 명만 있어도 삶은 행복한 거랬다. 글을 쓰다 외로워질 때마다 그들은 나에게 큰 힘이 된다. 할머니들도 그렇지 않을까.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웃는 순간들이 느리게 흐르는 삶에서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

  

   악어가죽 무늬 케이스를 끼운 휴대폰이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시끄러운 노랫소리와 함께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개 속에서 나는 울었어. 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듣다 보니 익숙한 노래다. 오래전 유행했던 가수 코요태의 ‘열정’이라는 노래였다. 할머니들은 뽀글 머리를 맞대고 영상을 보며 노래를 잘하네, 춤을 잘 추네 하며 칭찬을 건넨다. 어깨를 들썩이며 와르르 웃는다.

   ‘활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그런 사랑, 그런 사랑.’ 그녀들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박자도 음정도 제각각이었지만 노래 제목 그대로 열정적이었다. 이 노래는 대체 어떻게 알고 부르는 걸까. 세 번째 편견이 튀어나왔다. 손자나 손녀가 알려줬을 수도 있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듣고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다 같이 노래교실에서 배웠을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사랑을 외치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삼 깨달았다. 내가 아직 20대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 것처럼,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껍데기는 낡아가지만 우리의 영혼만큼은 가장 아름다운 시절, 행복한 순간에 멈춰 있다.

       

   “맞다, 나 아까 말이여, 저기 카운터에 있는 저거, 커피에 넣을 뻔했다니께.”

   “저거 말이여? 손세정제 아녀.”

   “시럽인 줄 알고 커피에 넣어 마시려고 했지.”

   무심히 듣고 있던 다른 할머니가 한마디 툭 던진다.

   “아무튼 늙으면 그냥 죽던가 해야 혀.”


   그 말에 나도, 카운터의 사장님도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할머니의 말처럼 인생을 그저 담백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녀들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조용한 웃음소리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며 카페에 울려 퍼졌다. 할머니 한 명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몰래 듣다 들킨 기분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모든 편견은 사라지고 우리는 다 같이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종종 편견을 가지고 상황을 단정 짓거나, 어떤 사람의 한 단면만 보고 싫어하기도 한다.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쉽게 오해하고, 쉽게 화를 내고, 쉽게 비난한다. 겹겹이 쌓인 편견을 부지런히 벗겨내지 않으면 삶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지나치게 된다. 편견에 지지 않고, 타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것. 할머니들을 통해 잊고 있던 삶의 태도 한 조각을 다시 마음에 주워 담았다.

   카페의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할머니들은 여전히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웃고, 사장님은 조용히 손세정제를 반대편으로 옮겨 둔다. 카페의 공기는 새롭게 변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느슨하고 편안한 기분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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