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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Nov 20. 2023

적당한 미니멀 라이프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벌써 이사할 때가 되었나 싶은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이번에는 좀 오래 머무르려 했지만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새로운 보금자리 찾기는 영 쉽지 않다. 이사는 결정했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 마음도 덩달아 붕 뜨는 기분이다. 이사를 몇 번 하다 보면 요령이 생겨 언젠가 하게 될 이사를 대비해 물건을 미리 정리하게 된다. 이번에는 마음을 가라앉힐 겸 조금 빨리 시작하기로 했다. 집에는 그새 많은 짐이 새로 들어오고 잔뜩 쌓여있다. 매번 물건을 많이 들이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대량 세일하는 생필품이라던가, 아이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인형들, 입어야지 해놓고 올해도 입지 못한 옷가지들, 신발들, 명절선물 세트와 몇 년 전 잔뜩 사둔 마스크는 결국 올해도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정리의 목표는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울 것. 그간 몇 번이나 미니멀 라이프에 도전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나는 미니멀과는 거리가 먼, 모든 물건에 애정 가득한 사람이었다. 물건을 정리하려고 앉았다가 작은 쪽지와 그림을 펼쳐보며 시간 여행을 떠나기 일쑤인 사람이었다. 그러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정리는 되지 않고, 결국 다시 서랍 안으로 물건들을 되돌려놓기 바쁜 사람이었다. 몇 번의 이사를 통해 물건 버리기에는 용기가 생겼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을 쌓아둔다. 기부하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면 물건들은 나름 잘 쓰이게 되지만, 결국 필요를 가장한 다른 물건을 집에 들여놓고야 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한 미니멀 라이프 도전이기 때문이다.


  글 쓰는 시간 확보를 위해 도서관과 카페를 전전하다 보니 조금 지쳤다고 해야 할까.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따뜻한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이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집안일에 시선을 빼앗기면 안 된다. 이번 정리의 목표는 글 쓰는 나를 위한 비움이다. 나는 거창한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진 않는다. 이른바 적당한 미니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미니멀을 추구하기로 했다. 하루에 한 공간씩 천천히 비워나가기. 가장 먼저 냉장고를 비우기로 했다. 날짜 지난 소스들, 다 쓴 줄 알고 샀지만 벌서 세 개나 생긴 간장, 산지도 모르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식재료들, 작년에 받은 김장김치는 점점 묵은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냉동실이야말로 고대 유물은 여기 다 있는 것 같다. 언제 얼려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 흡사 돌덩이 같이 꽁꽁 언 재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냉장고 정리를 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먹을거리를 사고 동시에 낭비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구석구석 닦다 보니 어느새 텅 비었다. 한꺼번에 정리하겠다고 무리하다 보면 금세 지치고 만다. 이건 정리에 있어 가장 단순한 진리다. 천천히, 그리고 공간을 나눠 조금씩 정리했다. 오늘은 냉장고, 내일은 수납장, 내일모레는 팬트리. 정리를 하고 나면 뿌듯함은 물론이고 얼마나 많은 물건이 우리 집에 있었나 알게 된다. 필요하지 않은 건 사지 말자고 언제나 물건을 사기 전 되뇌지만 왜 같은 물건이 잔뜩 쌓여있는지 정말 신기할 노릇이다. 이쯤 되면 내가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 물건에 오히려 눌려 사는 삶은 내가 내 숨통을 조이는 셈이 될 테니까.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야 하나의 완성된 글이 나오듯, 나의 집과 나의 삶도 수시로 정리하고 비워내야 숨 쉴 구멍을 찾는다. 그래야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대신 욕심은 금물.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감성 충만하고 넓고 깔끔한 집을 목표로 삼는다면 무조건 실패하기 마련이다. 적당한 미니멀 라이프.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의 비움이 필요하다. 내가 무슨 미니멀이야, 그냥 이대로 살련다 하며 모든 걸 포기하고 정리하던 물건을 도로 서랍에 넣고 있지는 않는지. 지금부터 물건은 적당히 소유하고, 또 할 수 있는 만큼 비우면서 일상을 재정비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바꾸어가 보면 어떨까.

  

  오늘은 책장을 정리할 차례다. 왼쪽부터 하나씩. 추억의 책은 사진을 찍어두고, 밑줄이나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책의 문장들은 따로 적어두고, 중고로 팔거나 버려야 할 책은 따로 쌓아두고, 풀지 않고 깨끗한 문제집은 주변에 나눠주기로 한다. 이렇게 한 칸씩 비우다 보면 오늘의 비움은 성공이다. 추억을 떠올리고, 마음을 정돈하며 나머지 하루를 잘 살아낼 힘을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힘. 비움은 삶의 에너지를 만드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 삶이 또렷해지는 순간은, 나의 공간에 물건을 쌓아둘 때가 아닌, 비우고 난 뒤 깨끗하게 청소할 때가 아닐까. 그리고 단정해진 그 공간에서 내가 가장 집중하고 싶은 일, 해내고 싶은 일을 평온하게 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하나씩 비우고, 비워진 공간에는 나의 글로 채운다. 적당한 미니멀을 통해 나는 쓰는 삶에 한걸음 더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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