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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Dec 01. 2023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우리가 처음 만난 그림책

 

  생각해 보면 나는 육아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고,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니까. 언제나 ‘나의 행복’이 먼저였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고 우리에게 찾아온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날, 수많은 감정이 쏟아졌다. 내가 엄마가 된다고? 내 뱃속에 정말 생명을 품고 있다고? 엄청나게 소중한 무언가를 덜컥 맡게 된 기분이었다. 신기하고 기뻤지만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이 모든 걱정은 아이를 만나는 순간 사라졌다. 커다랗고 동그란 초코볼 같은 아이의 눈은 마치 까만 우주 같았다. 안녕, 나의 작은 우주야. 만나서 반가워.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은 없지만 온 힘을 다해 널 지켜줄 거야.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갓 태어난 아이와의 나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들었다. 만지기만 해도 부러질 것만 같아 늘 엉거주춤 아이를 안았다. 기저귀 가는 것도 수유 후 트림을 시키는 것도 요령이 없어 어려웠다. 둘만 덩그러니 남겨진 하루는 너무 길었다. 늘 잠이 부족했고, 외로웠고, 막막했다. 아이가 예쁠수록 내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부엌 창 너머로 핑크빛 하늘이 보였다. 젖병 소독을 하다 말고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엄마가 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거였구나. 하늘은 저렇게 눈물 나게 아름다운데, 난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대로는 끝도 보이지 않는 저 밑으로 가라앉을게 분명했다. 기분을 바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작정 유명한 그림책 세 권을 주문했다.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긴 하루를 버틸 생각이었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아이 옆에 누워 천천히 책을 읽어주었다. 그때마다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듯 울음도 버둥거림도 멈추곤 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려면 이것뿐이구나. 그날부터 그림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었다. 이건 촉감책이라는 거야. 빨간색, 검은색, 파란색으로 되어 있네. 여기 동물이 그려져 있어. 이건 사자, 오리, 곰, 토끼. 이 안에 비닐을 넣어 바스락거리게 만든 책이야, 신기하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책장에 그림책이 늘어날수록 눈물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처음으로 읽어준 책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였다. 국민 그림책으로 유명했던 <사과가 쿵!>, <달님 안녕>과 함께 주문한 책이다. 곰돌이를 든 귀여운 아이가 웃고 있는 표지를 열면 이런 문구가 나온다.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우리 아가에게’. 나는 ‘아가’라는 단어가 좋았다. 보송하고 젖내 나는 아이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이 책은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이 내내 반복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 깊은 곳에서 온몸 구석구석까지. 책을 읽을 때마다 딸의 팔과 다리를 쭉쭉 주물러 주었고, 얼굴과 손가락, 발바닥에 마구 뽀뽀를 했다. 조그만 배에 부우 하고 바람을 넣으며 간지럼을 태우다 보면 웃음이 나왔다. 서툰 엄마였던 내가 그림책을 읽으며 사랑을 배운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아이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낯간지럽고 쑥스럽다면 나처럼 그림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나란히 앉아 함께 읽다 보면 저절로 사랑을 말하게 될 테니까. 우리는 이 책을 사랑했다. 무슨 책 읽을까 물으면 언제나 꼭 들고 올 정도로 좋아했다. 그림책 속 아이의 행동을 하나씩 따라 하며 웃던 눈부신 낮이 있었다. 글자는 몰라도 엄마가 읽는 문장들이 사랑을 말한다는 걸 알던 따뜻한 밤이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심심하거나 속상할 때마다 좋아하는 그림책을 꺼내 읽는다. 그림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문장을 시처럼 외운다. 아이와 나에게 그림책은 사랑이다. 우리가 만든 첫 번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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