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수진 Dec 11. 2023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오래된 것을 지키는 사람의 이야기


  너무 좋아해서 매일 읽은 탓에 책과 표지가 분리되거나 누렇게 변해버린 책이 있는지. '계몽사 디즈니 그림명작'이 내게 그랬다. 마르고 닳도록 읽느라 낱장이 다 떨어져 나가고 성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버리지 않고 오래 간직했다. 그 책을 읽던 유년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나의 딸이 내 추억의 그림책을 읽을 때의 감동이란. <용감한 재봉사>라는 책으로 태어나 처음 글자를 읽었고, <늙은 나귀 좀생이>를 읽으며 눈물짓던 순간은 마치 그림처럼 남아 있다. 오래된 책을 보관하다 보면 원치 않게 곰팡이가 슬고 벌레가 기어 나온다. 수시로 꺼내 빛을 쬐고 습기를 조절해야 한다. 햇빛이 너무 강하지 않은 곳에 책장을 둬야 변색을 막을 수 있다. 읽고 끝나는 게 아니라 소장하는데도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모두 비슷하다. 기쁨과 더불어 많은 수고가 든다.

     

  아이와 오랜 시간 그림책을 읽다 보면 좋아하는 작가나 취향이 생긴다. 간직하고픈 책을 조금씩 사다 보니 어느새 책장이 꽉 차게 되었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이세 히데코 작가의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다. 이 책을 읽으며 ‘를리외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프랑스어로 제본공을 뜻하는 말로, 낡은 책을 고치는 '수선공'에 좀 더 가깝다. 아끼는 책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인 것이다.

     

  주인공 소피는 자신이 아끼는 식물도감이 망가져버리자 슬퍼한다. 새 책을 사지 않고 수리하는 쪽을 선택한다. 수소문 끝에 를리외르에게 책 표지를 새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아저씨는 얼렁뚱땅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소피에게 자연스레 틈을 내어준다. 도감을 분리해서 한 장씩 꿰매고 풀칠을 한 뒤 말린다. 책 수선 과정을 차례대로 보여주고 설명해 준다. 섬세하게 책을 다루는 를리외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잔잔해진다. 오래된 것을 소중히 다루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게 된다. 나도 오래된 책을 들고 찾아가 보고 싶을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아카시아 나무 그림이 새로운 표지가 된 도감을 받은 소피는 책을 꼭 안으며 기뻐한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디즈니 명작을 읽으며 미소 짓던 내 모습이자 그림책을 쌓아놓고 읽으며 행복해하던 딸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림 속 아이와 우리는 닮았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이 장면을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한다. 눈감았다 뜨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나 하나쯤은 세상과 반대로 느리게 흘러가도 되지 않을까. 빠르면 마음이 급해진다. 알맞게 가고 있는데도 남과 자꾸 비교하게 된다. 천천히 책을 읽고 계절의 흐름을 느끼는 것. 주변 풍경 속 작은 변화를 알아채는 것.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를 읽다 보면 느린 흐름속에 머물고 싶어 진다.


  흔히 낡은 것은 고리타분하다 말한다. 시대에 뒤처졌다거나 트렌드를 읽지 못한다고도 한다. 나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비쳐도 좋다. 를리외르 아저씨의 스승이었던 아버지가 말한다.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좋아. 그러나 좋은 손을 갖도록 해라. 한 권의 책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의 훌륭한 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손. 낡고 오래된 것을 지키는 를리외르처럼 나도 좋은 이야기를 쓰는 손을 갖고 싶다. 읽는 이에게 따뜻함을 남길 수 있도록. 매일 천천히 나의 풍경을 지켜나가며 쓰고 싶다. 그게 바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