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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걸으멍] 가파도

걷기 좋은 길 8. 섬 중에 섬. 가파도

by 조현

<노래와 바람사이,

가파도를 아시나요?>


바람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추억이 되던 날.
우리는 가파도에 닿았습니다.
노래와 바람사이, 가파도를 아시나요?


가파도 가봤어? 못 가봤어!

청보리밭 보았어? 못 가봤다니까!

- 우리 가족의 애창곡. <가파도>이다.


섬 속의 섬, 가파도.

제주본섬에서 10분 남짓, 작은 섬이다.

봄이 오면,

섬전체가 청보리밭으로 넘실대어,

초록빛 바다가 한 겹 더 생긴다는 가파도.


어느 5월의 봄날, 아빠는 친구들과 제주 여행을 떠나셨다.

목적지는 바로 그 '가파도'였다.

청보리밭이 바다처럼 넘실댄다는, 가파도의 청보리밭을 보러.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의 애창곡은 자연스레 <가파도>가 되었다.

먼저, 아빠가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가파도 가봤어?"

"청보리밭 보았어?"

그러면 우리는 한 목소리로 답한다.

"못 가봤어!"

"못 가봤다니까!"


갑자기 시작된 노래에

우리 가족은 웃음으로 이어진다.



가파도

-노래 최백호


가파도 가봤어? (못 가봤어)
청보리밭 보았어? (못 가봤다니까)
청보리밭에 누워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떠올라 눈물이 나지
하동포구에 바람이 자고, 파도 넘어 한라산에 노을이 들면
바다로 나간 정든 얼굴들 올레길 따라 돌아오겠지

가파도 가봤어? (못 가봤어)
소라 전복 먹었어? (못 가봤다니까)
휘돌아 치는 거친 파도는 수평선이 가만가만 다독여주고
밤이 내리면 별들이 모여 우리들의 노래에 귀 기울이지

가파도 가봤어? (못 가봤어)
청보리밭 보았어 (못 가봤다니까)
청보리밭에 누워 하늘을 보면 나두야 구름 따라 흘러간다네
가파도 가봤어?

-작사, 작곡 : 최백호

노래를 부르던 우리가, 드디어 가파도로 떠났다.

비록 5월의 청보리밭은 아니었지만, 11월의 가파도도 충분히 푸르렀다.

11월, 청보리는 아니어도 파릇파릇했다!

가파도를 가려면 '운진항'에서 배를 탄다.

나름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했지만, 늘 그렇듯 느긋한 올빼미 가족답게 12시에야 배를 탔다.

배는 전날 미리 전화로 예약했다. 관광객이 많은 날엔 표가 매진될 수 있으니, 미리 왕복으로 예약하는 것이 좋다.

보통, 두 시간 정도 섬을 둘러본 뒤 돌아오는 일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밥도 먹고, 사진도 찍고, 또 율이가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으니 여유롭게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배는 마지막배, 오후 4시 10분 배를 예약했다.

비수기라 가능한 선택이었다. 전화로 예약하니 확인 문자가 왔다.

운진항에 도착해, 인적사항 등을 기록하는 승선신고서를 작성하고 배에 올랐다.

무지개빛 예쁜 배가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배에 오르자마자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엔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좌석들이 있고, 2층에는 시야가 트여있어 마음까지 시원했다.


배멀미가 심한 나는 바람이 부는 2층에 앉았다.


배가 출발하자,

눈이 부시게 찬란한 바다가 펼쳐졌다.

뒤로는 제주 본섬의 산방산이 뚜렷하게 보였다.

시원한 바람, 반짝이는 물빛 윤슬.

끊임없이 카메라의 셔터소리가 계속되었다.

"찰칵"


배에 오른 지 10분 남짓, 드디어 가파도에 닿았다.

가파도에 내리자

섬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었다.

안내문에는 위치와 방향, 그리고 길의 매력까지 친절히 적혀있었다.

'보리밭이 예쁜 길',

'제주본섬이 잘 보이는 길'

'일몰이 가장 예쁜 곳' 등.

우리는 시간도 많고, 마음도 여유로워, 모든 길을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가파도는 올레길 코스 10-1 이기도 하다.

우린 지도의 파란 선을 따라 섬을 천천히 돌았다.

우리 가족은, 처음 30여 분간 바다 둘레길을 따라 걷다가,

식당에 들러 밥을 먹고,

다시 1시간 남짓, 올레길을 중심으로 따라 걸었다.

이렇게 걸어도 사실 2시간이면 돌아본다.



배에서 내려, 섬을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걸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산책길이 이어져 있었다.

햇살은 반짝였고, 바람은 따스했다.

11월의 가파도는

초겨울의 매서움이 아니라, 늦가을의 부드러움이었다.

얇은 긴팔티 하나정도면 충분한 날씨.

길가엔, 들꽃과 갈대가 흔들리며 가을빛을 만들고 있었다.


섬을 산책하다 보면,

'올레길' 표시와 함께

'마라도가 보이는 지점'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아득히 보이는,

납작한 섬 하나.

마라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파도와 마라도를 하루 일정으로 묶어 다녀온다.

오전엔 가파도. 오후엔 마라도.

우리 가족은 예전에 마라도를 가 본 적이 있어, 이번엔 가파도만 왔다.


예전에 마라도에 가서 짜장면을 먹은 적이 있다.

"짜장면 시키신 분!" 광고가 한창 유행이던 시절, 그 붐을 따라 '마라도 짜장면'이 이름을 알렸다.

(이 말에 피식 웃는 사람이라면, 분명 011 번호를 써본 세대일 것이다!)

나중엔, 무한도전 프로그램에서도 마라도 짜장면이 등장했다.

그 짜장면을 우리 가족도 먹어봤다.

우리 율이는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평소 그렇게 좋아하는 짜장면을 반이나 남겼지만.


이날,

가파도에서 멀리 마라도를 바라보며

그때를 추억할 수 있었다.




길을 따라 더 걷다 보니 해녀분들의 작은 주차장을 보게 되었다.

제주곳곳을 다녔지만,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작은 전동스쿠터들이 줄지어 있었다.

두 손 가득,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돌아오실 모습들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나란히 서 있는 이 전동 스쿠터들이 너무 귀여웠다.

제주도 해녀들은 생각보다 먼바다로 향하지 않으신다.

(드라마 보면 배 타고 멀리 가시던데,

우리가 두 달 살며 본모습은,

대부분 바다를 향해 두 발로 걸어가셨다.)

비교적 가까운 바다에서 작업을 하시는데,

이날,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해녀분들은 묵묵히 물질을 이어가고 계셨다.

한 줄로 주차된 이 전동스쿠터는

그분들 만의 자가용이자,

아마도,

그들의 하루인가 보다.



걷기 시작한 지 30분쯤, 식당에서 생선구이 백반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 근처엔 '가파초등학교'가 있었다.

2025년 현재, 학생 수가 단 네 명뿐이라는 가파초등학교.

아직까지도 운영 중인 학교가 참으로 반가웠다.

얼마 전, 학생 수 감소로 가파초등학교가 이제 분교로 개편된다는 기사를 봤다.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학교가 사라질지 모른다니,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섬 어딘가에서 뛰어놀고 있을 네 명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나는 괜히 가슴이 따뜻해졌다.



본격적으로 올레길을 따라 걸었다.

섬의 중앙을 가로 지어 가는 올레길은,

탁 트인 섬을 보여준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아마도, 이곳이

5월이 되면,

청보리밭 넘실거리는 그곳인가 보다.

청보리밭이
드넓게, 푸르르게
출렁거리지 않아도.

충분히,
눈부시게 찬란했다.


이 가파도엔 독특한 하르방들이 있다.

제각각 포즈를 취하고

웃고 있는 돌하르방들.

멈춰서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꽃과 하트로 장식한 이 하트 하르방은 한동안 나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었다.

그 뒤로 보이는 산방산까지.

너무 귀여운 돌하르방들이다.



이 돌하르방들을 지나, 바다가 펼쳐지는 해안도로와 다시 만난다.

이 도로를 걷다 보면

나의 브런치북에도 자주 등장하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촬영지 표지판이 보인다.

나처럼,

장애형제가 있는 비장애형제이자, 1년 차 아기해녀 '영옥'.

그리고 그런 영옥을 사랑하는 선장 '정준'.

그 둘의 달달하고 설레는 모습을 보여주는 곳.

바로 가파도이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다운증후군 형제를 둔, '영옥'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비장애형제로써, 너무 감사한 드라마이다.

드라마 속 비장애형제인 '영옥'은
삐뚤삐뚤 비틀리지도,
항상 우울하지도,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도 않던,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형제들과 살아가야 하는,
살아내야만 하는
비장애형제의 삶의 한 부분을,
누군가의 일상을 보여준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오늘은 가파도 이야기니, 여기까지만.)


그 드라마를 통해서,

나는 처음으로 "'비장애형제'로서의 우리"를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가까이 있어서 몰랐던 나의 감정,

당연한 아픔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모습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우리의 눈물들까지.

TV너머로 잔잔하게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나에겐 특별할 수밖에 없는

그 '영옥'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이곳,

'가파도'는 내게 유난히 따뜻했다.







가파도에서는 제주도의 일곱 산 중, 여섯 개가 보인다고 한다.

한라산, 송악산, 산방산, 군산, 고근산, 단산.

유일하게 안 보이는 건 영주산뿐이라고 한다.



섬 속의 섬 가파도는,
제주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멀리서 봐야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듯,
제주도도, 우리의 삶도
이 섬 위에서 다시 보인다.


제주도를

삶을


더 다양하게,

더 다채롭게,

다른 방향에서 새롭게

보는 방법.


한 발 물러서 보는 것이다.





섬을 통과하는 '중앙길'을 통해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

길가엔 벽화와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배시간이 남아,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여유롭게 앉아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여행보다,

이렇게 느긋하게 앉아 바람을 맞는 게 훨씬 좋았다.

배를 타고 돌아올 때쯤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해가 기울고, 바다 위엔 금빛이 번졌다.

그렇게, 가파도에서의 하루가 저물었다.




제주도의 축소판 같으면서도,
한 발 물러서
제주를 바라볼 수 있는 곳.

드라마 속 주인공이 행복했던 곳.
아주 작은 학교가 아직 남아 있는 곳.


그 모든 장면을 떠올리며

다시 노래를 부른다.


노래 속 섬은 현실이 되어,

우리 가족의 추억 속으로 스며들었다.


가파도 가봤어? 가봤어!

청보리밭 보았어?

그건..... 다음 봄에 다시 올 거야!


멸치를 멸찌라고 쓴 동생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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