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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아 Dec 14. 2015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것

지나고 남는 건 시덥잖은 농담

2005년,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봤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은 사실 생사 여부도 모르는, 당시엔 거의 일 주일에 세 번은 만나던 애랑 봤다.


고1 때였다. 그때 어떤 감정으로 봤었는지, 이해는 했었는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어릴 때부터 겉멋 하나는 타고난 내가 대사를 인용하며 또 보고싶다고 싸이월드에 써둔 걸 얼마 전에 찾았을 뿐이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봤고 볼 때마다 다른 감정이 읽혔다. 막상 정말 지우고싶은 시기를 지날 때는 멀리했다. 그렇게 가장 아끼는 몇 편의 영화 중 하나지만 한참을 덮어둔 채 20대 중반이 지났다.


어제, 10년 만에 '극장에서' 다시 본 이터널 선샤인도 또 달랐다. 처음만큼, 두 번째 만큼은 아프지 않았고, 너무 자주 봐서 볼 때마다 무뎌졌던 때보다는 신선했다.


문득 깨달았다. 정작 지나고 나서 남는 건 어떤 로맨틱한 이벤트도, 달아서 죽을 것 같은 한 마디도 아니었다. 시덥잖은 농담, 헛웃음나던 유치한 장난, 사소한 말다툼, 내가 했던 작은 말실수, 그런 작은 것들. 지워져가는 조엘의 기억 속에선 어떤 로맨스보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잔뜩 남았다.


들춰본 내 기억에도 남은 사람들의 모습은, 떡볶이의 계란이나, 무심하게 건네주던 겉옷, 첫 과외비로 내게 사줬던 금방 망가져버린 텀블러나, 쌀국수에 숙주 얼마나 넣을 거냐고 묻던 웃음이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참 우습다. 다들 뜨겁게 좋아하고 시리게 아팠을텐데 결국 남은 게 그런 시덥잖은 농담같은 기억 뿐이다. 언젠간 꼭 추운 겨울에 몬탁에 가고싶어졌다. 그렇게 추운 뉴욕엔 두 번 다시 안 가고싶을 줄 알았는데. 시덥잖은 농담도 더 많이 해야겠다. 죽을 것 같은 로맨스보단 그런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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