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 김연수
삶은 종종 구구절절한 이야기 한 바닥 보다, 한 마디로 더 간결하게 표현된다. "해보긴 해봤어?"라는 명언을 남긴 정주영은 정말 이것저것 해보는 삶을 살았고, "나는 보이는 것이 아닌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고 말한 사람이 피카소인것 처럼.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다만 혀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어부의 다부진 팔뚝에 묻은 뱃노동처럼, 수년의 풍랑과 파도를 뚫고 나온 한마디다. 말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이유는 '삶'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을 담고는 혁혁히 과거를 뱉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무슨 소리야?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해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광수가 위처럼 말했을 때 가슴이 아팠던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선영과 결혼을 앞둔 광수는 사랑한다는 선영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야?"하고 물었다. 수년을 연애하며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광수였다. 캄캄한 어둠에 가려 한 바닥도 쓰여있지 않던 그들의 연애사가 그 한마디로 드러났다. 책을 읽으며 선영에게 드는 미움의 시작과 끝은 오직 그 한마디었다. 빛보다 밝은 말이었다.
광수는 선영을 사랑했다. 선영은 광수를 좋아했고, 늘 감사했다. 하지만 기울어진 시소 같은 사랑을 멋없이 쏟아내던 광수가 주춤하자 선영은 겁이 났다. '이별'을 겁내서 였다. 평생 변함없을 것 같았던 광수의 '주춤거림'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뜬금없이 사랑을 고백했고, 광수는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실연이란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작가는 실연을 그렇게 정의했다. '나'를 무한히 확장시킨 사랑의 부재가 곧 '나'의 부재로 이어진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 그 방대한 가능성의 상실은 스스로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겠다. 이별은 두 개의 별은 아니지만, 우주의 두 별 만큼의 거리를 둔다. 나와 무한히 확장된 나 사이의 거리다.
대학시절을 함께 했던 과거의 연인은 헤어지자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늘 나를 좋아해 줄 것 같았던 오빠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때의 그녀는 나를 붙잡았지만, 사실 자신을 붙잡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커진 자신의 모습을 잃기 두려웠을지 모른다.
광수는 결국 선영과 헤어지지 않았다. 멋없이 쏟아내던 비대칭적인 사랑은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가 보였다. 그럼에도 당시에 그가 느꼈을 심정은 여전히 먹먹하다. 다시 책을 들어 그 구절을 떠올렸다. 광수는 결혼을 앞두고 들은 첫 사랑고백에 아주 따가운 마음으로 말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