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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Nov 06. 2017

아주 외진 직장이라니!

저 좀 잡아가 주세요!

천문대는 대게 구석진 곳에 있다. 불 빛을 피하기 위해서다. 접근성을 위해 도시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렴 관측을 위해 선도 시의 빛을 피해 산 속이나 골짜기에 설립된다. 밤을 살게 한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은 구름보다 진하게 하늘을 가린다.

 내가 일하는 천문대는 특히나 깊숙이 위치하다. 지하철은 물론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부터 천문대까지는 걸어서 1시간이나 걸린다. 택시 아저씨마저도 오기를 꺼렸다. 돌아오는 길엔 여지없이 빈 차일 것이기 때문이다. 접근성과 영 거리가먼 천문대는 차가 있어야만 방문할 수 있다. 이쯤 되니 방문객은 그렇다 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도 애매하다.

 함께 일하는 S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천문대에 입사했다. 보통의 사회 초년생처럼 S도 차가 없었다. 회사가 마련해주는 숙소가 있었지만 그로부터도 걸어서 1시간이다. 출근을 위해선 무언가 방법이 필요하다.


저 좀 잡아가 주세요!


S가 택한 방법은 카풀이다. 차로 출근하는 누군가에게 픽업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S가 사용하는 언어가 새롭다. 태워달라는 것도 아니고 잡아가 달라니.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의 배려를 얻어야만 회사에 올 수 있다. 배려가 아니면 회사에 다다를 수 없다. 하지만 배려를 강요할 수도 없다.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잡아가라는 S의 한마디는 그렇게라도 출근을 시켜달라는 호소에 가깝다. 그래서 S는 매일 누군가에게 잡힌다.


 내가 처음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도 대학을 갓 졸업한 후였다. 차가 있을 리 만무했기에 직장상사와 카풀을 해서 천문대에 오곤 했다. 사람들은 직장상사와 카풀을 하고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들겠냐며 위로했다. 나는 교통비도 아끼고, 운전을 하지 않아도 돼서 그만한 호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겐 매우 불편한 시간으로 비쳤나보다. 하나 지금 돌이켜보니 주변에서 걱정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상사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천문대는 누군가 동행해야 하는 거리에 있다.

출근을 하게 되더라도 불편함이 끝난 것은 아니다. 주변에 편의시설이 전무하다. 은행이나 병원은 고사하고 그 흔한 편의점도 없다. 논과 밭, 소와 개들만이 천문대 주위를 늠름히 지킨다. 아니 지난다.

클릭 몇 번이면 어떤 음식이던 코 앞까지 배달해주는 시대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의 맥도널드 매장보다 한국의 치킨집이 2배나 많단다. 하지만 7만여 개에 달하는 그 어떤 치킨집에서도 천문대까지 배달은 해주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닥친 허기와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차를 끌고 나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보통 저녁식사는 외부에서 해결한다. 가는데도, 오는데도 아까운 시간이 든다. 한 번은 시간도 없고, 밥을 사러 나가기도 매우 애매해서 혹시나 하고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주 공손하고 죄송스러운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건넜다.


"저희 짜장면 좀… 배달해주실 수 있나요?"

"어디신데요?"

"용암리에 있는 어린이천문대요..."

"아... 네 알겠습니다."


의외로 싱거웠다. 평소에 자주 가던 곳이라 그런지 의외로 흔쾌히 배달을 해주신단다. 그럼에도 나는 ‘아…’라는 첫마디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저 사람의 ‘아’는 어떤 ‘아’일까.  알고 있는 위치를 뜻하는 감탄사의 ‘아’ 일까 아니면 ‘그런 곳에서 주문을…’하는 한탄의 ‘아’ 일까.  

 조금 미지근한 면이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찌 되었건 배달은 진행될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쾌재를 불렀다. '이제 밥 먹으러 저 멀리 나가도 되지 않겠구나!'하고 만세를 외쳤다. 밥을 먹으러 왕복하는 시간만 해도 30분은 걸리니 바꾸어 말하면 30분의 휴식을 얻은 셈이었다. 모두는 희망찬 미래를 싱글벙글 웃음으로 환대했다.

 

30분 뒤, 돌하르방 같은 표정이 사무실에 퍼졌다. 돌처럼 딱딱해진 짜장면과 마주한 후였다. 마을과 천문대까지의 거리는 탱탱한 면발이 흡사 떡으로 변신하도록 마법을 부렸다. 짜장 소스 대신 부러진 젓가락이 면과 섞였고, 짬뽕은 온기와 함께 맛도 잃었다. 게다가 짜장면이 배달된 그릇은 일회용 스티로폼이었다. 그릇을 찾으러 오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였다. 스티로폼 용기를 힘껏 누르듯 감싼 랩 위로 쿠폰 4장이 보였다. 재 방문을 기피하는 스티로폼과, 재 주문을 요구하는 쿠폰이 어색하게 어울렸다. 조금은 허탈하게 그 조합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챙겨야지’. 조심스레 쿠폰을 서랍에 넣었지만 쿠폰의 거취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벽돌로 써도 좋을 만한 짜장면 한 입에 곧장 쓰레기통 행으로 바뀌었다. 짜장면 벽돌 사건은 따뜻한 밥 한 끼를 갈망한 여섯 젊은이들을 따갑게 실망시켰다. 그날 이후 그 누구도 쉽사리 짜장면 드실래요? 하지 않았다. 종종 볶음밥 정도만 탐험적으로 맛볼 뿐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회사는 없다. 다만 누군가와 동행해야 닿을 수 있는 거리는 따뜻한 밥 한 끼와도 멀다는 것을 조금 배고프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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