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을 주고 싶을 때
태양은 곧 죽는다. 50억 살쯤 먹은 뚱뚱하고 막돼먹은 태양은 얼마 후 죽는다. 자외선을 표창처럼 던지며 나에게 고동색 피부를 선물한 태양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들이 황혼을 맞아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변해도 태양은 지금의 모습이겠지만, 결국 죽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요?"
"50억 년 후에"
“그래서요?”
“그래서요라니?”
"50억 년이면 우리랑 상관없지 않아요?"
"그래도 사라지잖아, 신기하지 않아?"
"우리랑 관련이 없잖아요"
"연예인도 우리랑 별로 관련 없지만 재밌잖아!"
"아니, 태양은 다르잖아요!"
예전에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말했다. 그래서요?,라고. 태양이 50억 년 후 사라지는 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없지. 물론 없지. 그 순간에는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알만한 그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무니 갑자기 힘이 쭉 빠진다. 아이들에게 과학은 가십거리보다 재미가 없다. ‘그래서요’에 한방 맞은 나는 민망함을 선크림처럼 바르고 따가운 별빛을 맞는다.
어떤 부분에서 과학과 가십은 별로 다르지 않다. 태양 표면이 이글거리는 용암보다 5배쯤 뜨겁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 하나도 도움되지 않는다. 태양에 몽고반점처럼 피어있는 흑점이 덜 뜨겁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이런 과학적 정보는 멜론 결제일이 이틀 남았다는 사실보다 덜 실용적이다. 편의점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돌릴 때 뚜껑을 빼지 않아도 된다는 것보다 덜 혁명적이고. 결국 과학도 인류 발전의 위대한 꿈 보단 흥미가 결정하는 순간이 있다.
천문학은 내 인생 전반에 널려있다. 먼지가 아침 이슬처럼 내린 책장에는 대부분은 천문학 책이 꽂혀있다. 내 많은 웹사이트의 비밀번호는 아직도 '별천지'다. 몇 년간 탄 비행기 값만 모았어도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시원한 콧방귀를 뀔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귀한 돈을 별을 보러 가는데 써버렸다. 밤하늘은 내게 그 정도로 흥미롭다. 천문학 없는 나는 의리 없는 김보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나에게 만이었다. 한길만 보고 좁게 살아온 나의 세계에서만 적용되는 진리였다. 누구에게나 밤하늘이 흥미롭고 중요하지는 않았다. 관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밤하늘 지식을 구겨 넣는 내게 아이들은 준엄한 심판을 내렸다. '그게 뭐요'. '그래서요'. 그럴 때면 뭐랄까, 소개팅에서 열심히 썰을 풀고 났더니 "그러시구나, 재밌는 얘기는 없어요?"하고 되물음 당한 것만 같다. 하. 나만 재밌는 이야기였다니.
<한 끼 줍쇼>라는 방송을 보면 스타급 연예인들이 초인종을 누르고 말한다. 안녕하세요, 가수 A입니다. 그러면 집주인은 이벤트에 당첨이라도 된 듯 화들짝 놀라며 좋아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 집엔 안 오냐며 기다리기도 한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그런데요?”. 어디에서나 환영받고 반짝이던 연예인들은 ‘그런대요’ 한방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기대했던 환대 대신 등장을 설명해야 하는 불청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긴,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대뜸 카메라를 대동하고 오다니. 남자 친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생얼과, 부모도 이해하지 못하는 방구석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나부터도 퇴짜를 놓겠다. 연예인의 방문이 누구에게나 선물이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삶은 그런 민망한 순간들의 연속인 것 같다. 주는 것과 다른 것이 영 다른 때가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것이 된다. 잔돈은 괜찮다는 말에 뭔 놈에 팁이냐며 천 원을 공중에 흩날린 택시 기사님도 있다. 필살기로 날린 개그가 아재냐는 비아냥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정직한 말이 ‘팩트 폭행’이 되어 멍을 만들 수도 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을 주어도 결국 판단은 받는 쪽에서 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미래 인류의 존망이 달린 태양의 부재도 누군가에겐 ‘그래서요?’가 되나 보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는 곱게 싸서 주어야 한다. 아무리 맛 좋은 커피를 준대도 잔에 손을 데이면 말짱 도루묵이다. 뜨거운 커피는 받침을 받쳐서 줘야 한다. 천문학 정보를 전달할 때는 재미난 상상과 이야기로 포장을 해야 한다. 하다못해 사랑을 줄 때도 시간과 공을 들여 천천히 주어야 탈이 없다. 무엇이든 줄게 있다면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더 좋아하는 것일수록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