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원래 발칙한 겁니다.

허세 담긴 취미로 허세부리기

by 조승현

헬스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에게 "오! 멋진데?"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근데 몸은 하나도 안 멋지네'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더 높아서 나는 늘 위축된다. 역시 취미를 공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자신 있게 말한다. 저, 헬스 합니다.


헬스를 시작하면서 좋았던 점은 딱히 큰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달에 5만 원쯤 하는 회원권을 끊고 밑창이 깨끗한 신발만 챙기면 헬스장은 내게 호텔 같은 서비스(3성급 정도)를 제공했다. 차곡차곡 개어있는 운동복, 무한 리필 온수, 빵빵한 샴푸, 종이장 같이 얇은 수건과 목욕탕 스킨로션까지. 출근 전에 헬스장에 가니 집에서 샤워할 일이 없어질 정도였다.

게다가 준비물이 덜 필요한 활동이라니, 이 얼마나 귀한가. 자고로 취미라는 것은 지갑을 땔감으로 삼아 열정을 불태우는 행위렸다. 통장 잔고 폭파 전문가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러닝을 하겠다고 스마트 워치를 구매하고, 글을 쓰겠다고 최신형 아이패드부터 지른 사람이다. 동네 뒷산을 올라도 첨단 고어텍스 옷과 등산화를 휘감는 게 우리 민족 아닌가. 그런 소비의 세계에 스니커즈 한 켤레를 지니고 뛰어들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드디어 지갑을 불사 지르지 않을 만한 취미를 갖게 된 것이다. 아버지, 보이십니까? 제가 이렇게나 경제관념이 뚜렷한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하나 이것은 내가 행해온 102,212번째 판단 착오일 뿐이었다.


허약한 나의 몸은 나이가 들수록 진가를 발휘해서 더 열정적으로 다쳤다. 보호대를 차야하는 때가 된 것이다. 무릎, 손목, 팔꿈치 보호대와 턱걸이용 스트랩, 리프팅 벨트 등등, 양초처럼 닳아가는 관절을 위해 각종 보호대를 사기 시작했다. 보호대를 쭉 진열해보니 마치 프로 헬서 같았다. 보호대를 전부 차고 나니 프로 헬서는 무슨, 프로 환자처럼 보였다. 그래도 차야했다. 안 그러면 진짜 환자가 될 테니까.

보호대는 가격도 비쌌다. 오천 원 짜리도 있긴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체득했지 않은가. 세상에 싸고 좋은 건 없다. 2만 원 아끼려다 20만 원을 병원비로 낼 것을 직감한 나는 보호대만큼은 최고급으로 샀다. 덕분에 지갑은 보호받지 못했다.

코로나19도 나를 소비의 구렁텅이로 떠밀었다. 코로나의 확산으로 헬스장을 가지 못하게 되자 기어이 집에 운동 기구를 사들인 것이다. 나는 아주 간단한 운동 기구만을 사기로 했다. 문제는 운동기구의 가격이 간단치 않다는 거다. 무슨 놈에 아령이, 헬스용 의자가, 철막대기 몇 개를 이어 붙인 턱걸이가 수십만 원씩 한단 말인가. 하지만 몸짱이 되겠다는 열망 하나로 통장을 불살랐고, 헬스장을 몇 년이나 다닐 수 있는 돈으로 산 운동기구는 비싸고 품위 있는 빨래 건조대가 되었다.

세상에 돈 안 드는 취미가 정말 있긴 한가요?



2년 전 독서 모임을 할 때였다. 일과 삶의 균형(일명 워라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A 씨는 취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취미란 그 취미가 가진 이미지를 얻는 행위 같아요. 골프를 칠 때의 몸짓 자체가 즐거운 사람도 있지만 골프가 주는 인상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 것처럼요"


나는 A 씨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취미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정말 맞는 말 같았다. 연약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무거운 쇳덩이 따위를 드는 일이 즐겁지 않다. 헬스를 하며 끊임없이 다치는 걸 보면 꼭 건강해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오늘은 어떤 운동을 할까?'보다 '오늘도 운동을 해야 하나?' 란 물음이 더 많았으니, 나는 헬스라는 운동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헬스를 한다. 직장 생활이라는 거친 세계에 발을 담가두고도, 일주일에 세 번쯤은 몸 관리를 하는 건실한 청년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김종국 같은 몸은 감히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도 '자기 관리에 성실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헬스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 나는 헬스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

취미는 꼭 옷 같다. 어떤 취미든 그만의 색과 계절감, 인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취미를 하나씩 골라 입고 각자의 패션을 완성한다. 원하는 인상을 골라 입으며 자신을 꾸며간다.

내가 처음으로 골라 입은 취미는 별보기다. 뜨거운 쇠공 같은 사춘기를 겪으면서도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친구들에게 별을 본다고 말하면 "오, 별을 좋아해?" 하고 놀라며 나를 신비스럽게 바라봤다. 나는 그 눈빛이 싫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집 앞에 널린 돌멩이를 들고 무척 특별한 돌인 양 자랑하듯, 밤하늘에 널려있는 별을 몇 개 짚으며 특별한 사람인양 으쓱댔다. 내가 고1 때 산 것은 망원경이 아니라 '별을 보는 낭만 청년'의 이미지였나 싶기도 하다. 나는 순수하게 별만 사랑한다고 자부해왔지만, 돌이켜보면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 아이는 별빛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천문대 강사가 되었다. 직업으로서 별을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별 보기는 여전히 취미로 남아 종종 쉬는 날에도 별을 본다. 물론 빈도는, 어떤 알 수 없는 뇌세포의 장난으로 갑자기 대청소를 하고 싶어 하는 정도밖에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별을 본다. 월급과 관계없는 별을 보며 자부한다. 그만큼 별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순수하게 천문학을 사랑하는 걸까?'

그 간단한 질문에 나는 아직 답을 못했다. 만약 홀로 무인도에 살았어도 나는 별을 봤을까? 글쎄다. 아마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대신 물고기를 잡느라 만신창이가 된 스스로를 쓰다듬으며 폭신한 넝쿨 침대에 누워 이른 잠을 잤을 것이다. 낮시간에도 우주의 신비를 고민하는 대신 높이 매달린 야자수를 따기 위해 죄 없는 나무에 몸통 박치기나 해댔을 것이다. 다행이다. 생존보다 삶의 질에 집중할 수 있는 나라에 살면서 별을 좋아하게 되어서.


고결하게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른한 오후 햇살 속에서 당근케이크와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먹는 것 같이 완벽한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모든 순간이 꼭 지고지순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아메리카노의 맛보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자신의 모습이 좋은 사람도 있다. 당근케이크의 폭신함보다 이제 디저트 정도는 통장 잔고 고민 없이 주문할 수 있게 된 현재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커피에게 애정을 덜 가졌다거나 당근케이크를 모욕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발칙한 정도랄까?

나는 반짝이는 별의 아름다움도 좋아하고, 어두운 곳에서 황홀하게 펼쳐진 밤하늘도 사랑하지만, 그런 별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도 못지않게 사랑한다. 그것이 내가 천문학을 사랑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