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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Mar 07. 2022

다이어트의 역설

 자취를 하던 대학생 시절에 "집 나오면 먹는 게 부실할 텐데... 집밥 많이 생각나지?" 하며 어머니는 항상 걱정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며 깨달았다. '아, 집밥이란 것이 있었지?'. 어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집밥이 간절했던 적은 없다. 어머니의 식탁은 토끼 친화적인 나물 밥상이었고, 나는 티라노사우르스 못지않은 육식 파였다. 삼겹살집 이모님을 어머니 삼아, 치킨 배달부를 삼촌 삼아 행복한 고기 문화를 경험하고 있었으니 집밥이 생각날 리가. 먹여 키운 아이들이 이모양입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모든   고기를 너무 좋아한 탓이다. 살면서 고기 때문에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열공이랍시고 괜히 새벽까지 머물던 3 시절, 집에 돌아오니 부엌엔 진한 국물의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뚝배기에 모셔져 있었다. 나는 고민 없이 고기만 골라먹었다. 배부르고  따신 다음날 아침, "!" 하는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내게로 향했다. "이눔시캬,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였는데 그냥 김치찌개가 됐잖아!"  

 오죽하면 두 번째 책을 편집해주시면 마음의 숲 출판사 편집자님도 주기적으로 보내는 원고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씀하셨다. "작가님, 이제 고기 얘기는 그만 그만! 제발 그만요!". 그런 말을 듣고도 지금 고기 얘기를 쓰고 있다. 제가 얼마나 육식을 사랑하는지 아시겠죠?


 이런 내가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재작년 받은 건강 검진이 화근이었다. 건강 검진 결과에는 의사의 소견이 간결하게 쓰여있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습니다.' 수치를 자세히 살펴보니 정상 범위보다 고작 1%가량 높았다. 나는 '이 정도면 사실상 정상이지' 하고 안도했지만 와이프의 생각은 달랐다. 와이프는 소견서를 써준 의사처럼 간결하게 말했다.

"다음 건강검진 때에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면 지금처럼은 고기 못 먹을 줄 알아."

 흥선대원군에 못지않은 와이프의 고기 쇄국 정책은 위협적이었다. 나의 건강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하지만, 나의 혓바닥은 생각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건강검진은 이번 달로 다가왔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지 못하면 그동안 지켜온 고기 민주주의는 힘없이 스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건강검진 때까지만이라도 지방이 많은 고기를 끊어야 한다. 사랑해마지않는 나의 치킨 동생과 등심 형님, 삼겹살 친구들까지 모두 잠깐의 안녕을 고해야 한다. 고기를 먹기 위해 고기를 끊어야 한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겐나디 파달카 (c)NASA

 2015년, 러시아 우주인 겐나디 파달카는 신기록을 세웠다. 879일간 우주에서 미션을 수행하며 '우주에서 가장 오래 머문 사람'이 된 것이다.

 우주 공간은 인간에게 꽤나 해롭다. 무중력이나 정서적인 문제도 있지만, 가장 위협적인 것은 태양에서 쏟아지는 다량의 방사선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의 피방사선량은 연간 3~5mSv(밀리시버트)에 불과하다. 반면 ISS에 거주하는 우주인들은 연간 100배나 많은 300mSv의 방사선에 노출된다. 무중력으로 인한 근육 및 시력 약화, 골밀도 감소도 옵션처럼 뒤따른다.

 이 때문에 NASA는 우주인들이 우주에 머무는 기간을 최장 6개월 정도로 제한한다. 피폭되는 방사선량을 조절하기 위해서다. 권고에 따라 국제 우주정거장(ISS)에 머무는 우주인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구로 귀환한다. 파달카도 마찬가지였다. 879일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우주에 머물렀지만, 6개월 정도가 되면 다시 지구로 내려와 몸을 회복했다. 꾸준히 쌓여가던 방사선량에 '잠시 멈춤'을 선언하는 것이다. 무중력 공간에 머물며 손상된 근육을 회복하는 기회도 갖는다. 우습게도 우주에 더 머물기 위해서는 우주에서 머무는 것을 잠깐 쉬어야 한다. 덕분에 그는 우주에서 가장 오래 머문 산 사나이가 되었다.


 고기도 마찬가지다. 고기를 오래 먹기 위해서 잠깐 고기를 끊어야 한다. 행복은 '등심 맛'같은 것이라며 혈관에 끼얹던 지방에 잠시 '멈춤'을 선언해야 한다. 그동안 소홀했던 달리기도 좀 해야 한다. 다이어트를 성공해야 순탄한 육식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

  고기는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고 내가 생생히 살아있다는 에너지를 뿐더러, 가끔 소고기를 입에 넣을 땐 명품백을 혓바닥에 거는 것 같은 자부심마저 느끼게 한다. 하지만 구슬을 꿰어야 보배고 고기는 먹어야 가치가 있다. 그러니 나는 3주 앞으로 다가온 시험대에서 정상 콜레스테롤 수치를 받아내고 말 것이다. 식단 조절에 성공하여 편견 없이 고기를 마주할 것이다. 다이어트를 시작했는데, 한 것은 고기 얘기뿐이다. 역시 고기는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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