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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혁 Jul 24. 2016

[절찬 상영중] 부산행

경계 위에 선 존재들

정말, 덥다. 실외는 한증막 같다. 살기 위해선 얼른 냉방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화관만 한 피서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적정 온도의 냉방이 가동되는 영화관 안에서, 푹신한 좌석에 앉아, 시원한 음료로 식도를 식히며, 오랜 시간 개봉을 기다려왔던 영화를 관람하는 것. 이것은 약 2시간 동안의 순정(純正)한 행복이다. 

영화 <부산행>은 여러모로 더위를 쫓아내는 살풀이 같은 영화를 표방한다.

 

<부산행>은 여름이면 찾아오는 공포영화 장르 중에서 탄탄한 하부 장르를 형성하고 있는 좀비물이다. 달리는 고속열차 KTX라는 폐쇄적 공간 속에서 생존자들은 살점을 물어뜯는 좀비와 맞닥뜨려야 한다. 닭살 솟아나는 장면들이 적지 않다.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멋대로 관절을 꺾으며 사람들에게 뛰어드는 좀비들과의 육탄전은 여름 영화의 냄새를 진하게 한다. 결정적으로 여름용 대작이라면 빠질 수 없는 마구잡이 때려부수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부산행>을 단순히 여름용 블록버스터로 명명하기에는 뭔가 께름칙하다. <돼지의 왕>, <사이비> 등 연상호 감독의 전작들을 돌이켜 보면 의문은 깊어진다. 인간과 사회의 추악한 민낯을 까발리는, 굉장한 박력을 지닌 영화들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부산행>이 예산과 내러티브 측면에서 
대중 상업영화의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라 하더라도
이 영화를 통해 곱씹어 볼만한 메시지는 엄연하다. 
영화 <부산행>은 '경계 위에 선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

먼저 좀비가 있다. 좀비는 산 것일까, 죽은 것일까? 좀비는 흔히 '살아 있는 시체'로 불린다. '살아 있는 시체'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영혼 없이 살덩이만 날뛰는 존재들이 바로 좀비다. 좀비가 생사의 경계선 바로 위에 발을 딛고 있다면, 생존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들은 살아 남기 위해 이기(利己)와 이타(利他)의 경계 위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나만 살아남을 것인가, 다른 사람도 살릴 것인가.
당면한 죽음의 그림자 앞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공허해지기 십상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휴머니즘의 깃발은 내려진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장면 하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히스 레저)가 설계한 '도덕 실험'이다. 내가 살기 위해선 상대방이 죽어야 하는 상황. 과연 생존 본능 앞에서 마냥 착하게만 행동할 수 있을까?  

재난과 테러가 만연한 사회다. 마치 영화 <데스티네이션>에서처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 모르는 세상이다. 영화 <부산행> 속 좀비나 악독한 인간보다 현실이 더 무서울 지경이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현실에서 발생한 고약한 사건들이 영화화된다. 영화가 현실이요, 현실이 영화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호접지몽이 따로 없다. 

그러니 <부산행>의 가장 비현실적인 설정은 좀비가 등장한다는 것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20대로 보이는 석우(공유)가 수안(김수안)의 아빠라는 점, 영양이 부실한 고칼로리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인 펀드매니저 석우(공유)가 모델급 몸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비현실적이다. 

절대로 공유가 부러워서 이러는 건 아니다. 



* 영화 <부산행> 예고편

https://youtu.be/UOTOjA0ng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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