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그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영화 <봄날은 간다>가 개봉한 지 어느덧 15년 정도 되었다.
이 영화는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의 호시절에 바치는 속절없는 위로'다.
더 넓게는 사그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영화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월의 흐름에도 이 영화의 힘은 퇴색하지 않았으며 외려 생명력을 더해가는 듯하다. 사계절 푸른 대나무처럼.
"라면 먹고 갈래?"라는 대사가 처음 등장한 영화로 널리 알려진 <봄날은 간다>. 이제는 관용구가 되어 버린 "라면 먹고 갈래?"와 관련된 원래 대사는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 은수(이영애)는 "라면... 먹을래요?", "자고 갈래요?"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이 두 대사가 합쳐져 "라면 먹고 갈래?"가 탄생한 것 같다. 야밤에 자기 집에서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하는 은수의 권유는 사랑에 대한 은수의 적극적인 태도를 함축한다. 소리 채집 업무 때문에 만난 은수와 상우(유지태) 중 먼저 데이트를 요청한 쪽도 은수다. 단, 은수는 사랑을 시작할 때뿐만 아니라 끝내고자 할 때도 먼저 움직인다. 자신이 더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두려워해서 일까.
한편, 상우는 은수의 파경 경험을 알면서도 결혼을 재촉한다. '결혼', 이 두 음절에 대한 은수와 상우의 상이한 반응은 결국 두 사람의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금을 낸다. 결혼하겠다는 결심이 곧 확고부동한 사랑의 증표는 아니다. 즉, 결혼을 주저한다고 해서 은수가 상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두 사람의 감정의 페이스가 달랐다. 헤어지자는 은수에게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지만 정작 상우는 자신의 사랑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 사랑의 유효기간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구하려면 날 닮은 너, 널 닮은 나를 반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함께 하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어 변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변화의 폭을 두 사람 모두 감내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헤어지자"는 말을 누가 먼저 하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 말이 누군가의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이별이 다가옴을 은연중 느끼기 때문이다. 힘든 말을 꺼내기 싫은 사람이 모른 척할 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주인공 상우의 직업이 사운드 엔지니어인 만큼 보는 내내 아름다운 소리들이 귓전을 맴돈다. 단정한 미장센 속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적정한 연기는 이영애의 얼굴처럼 청아한 샷들이 이어지게 만든다. 움직임을 절제한 카메라는 숨 죽이며 인물들을 지켜본다. 모든 구성 요소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영화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 영화 <봄날은 간다> OST (김윤아 -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