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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 상영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식칼의 용도

by 김태혁

#1. 식칼의 용도

'먹방'과 '쿡방'은 최근 이삼 년 동안 한국 문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오죽하면 재개봉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하 '조제...')>을 감상할 때에도 '먹방'과 '쿡방'이 떠올랐을까. 티비에 난무하는 음식 프로그램들이 내 의식을 어지럽혔겠거니, 하고 넘어가려다 생각에 잠겼다.

영화 <조제...>야말로 진실한 '먹방'과 '쿡방'을 담아낸
정갈한 상차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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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지은 뜨끈한 쌀밥, 말끔히 돌돌 말린 계란말이, 윤택한 명란젓, 소박한 채소 반찬들... 주인공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와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의 사랑은 음식들과 함께 익어 갔다. 그런데 두 주인공의 배 속으로 들어가 사라진 요리들과 달리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이별 후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한 자루의 식칼이었다.

조제가 쓰는 식칼의 용도가 변해가는 과정은,
마치 조제와 츠네오의 관계가 변해가는 과정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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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처음 길거리에서 만난 날, 조제는 츠네오를 향해 식칼을 휘두른다. 호신용으로 사용된 식칼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조제의 심리를 보여준다. 조제가 츠네오를 위협하는 데 사용한 식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제가 츠네오를 위한 식사를 준비할 때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다. 두 사람의 이별 후, 식칼은 혼자서도 꿋꿋이 삶을 지속하는 조제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석쇠 위에서 혼자 구워지는 생선 같은 처지일지라도,
언제나 그랬듯 조제는 녹록지 않은 나날들을 향해
'다이빙'할 것이다.



#2. 박제된 사랑의 시간과 변하는 사람들

영화 <조제...>는 도입부에서 이것이 이미 끝난 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려 준다. 스스로 스포일러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결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 할,
평범하다면 또 평범하다고도 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과정이 핵심이다.

영화 <조제...>는 조제가 그린 그림들로 시작한다. 이어서 츠네오의 내레이션은 조제가 찍은 사진들을 설명한다. 모든 기억이 그런 것처럼 "몇 년 전이더라?"라고 말하는 츠네오의 기억도 부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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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서 조제와 츠네오는 더 이상 서로의 곁에 없지만 조제가 찍은 사진은 두 사람이 공유한 시간의 흔적을 박제한다. 시간의 풍화작용 앞에 두 사람의 사랑도, 츠네오의 기억도 스러져 가지만 조제의 그림, 사진만큼은 한결같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웅변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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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츠네오가 첫 번째 남자친구였을 조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 나오는 대목을 통해서든, 본능적 깨달음에 의해서든

츠네오보다 훨씬 성숙한 자세로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언젠가 사랑이 끝나 다시 고독해 질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 한다. 한편, "난 생각해서 바꿀 수 없는 건 생각 안 해"라고 말하는 츠네오는 막연하게 영원한 사랑을 꿈꿀 뿐이다. 그는 엄습하는 현실의 장벽을 적극적으로 깨부수지 못하고 결국 도망쳐 나온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은 조제이지만, 마음의 결점이 더 많은 인물은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필요로 하는 츠네오일지도 모른다.

굳건히 홀로서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완성적인 동시에 타인을 온전히 포용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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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30초 예고편

https://youtu.be/bcJ-oqXC0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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