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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 상영중] 이터널 선샤인(2004)

사랑한 기억의 재구성

by 김태혁

#1. 사랑한 기억의 재구성


잠이 든다. 잠에서 깬다.


오늘의 나는 여전히 어제의 나와 동일한 존재인가?

매일 잠들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동일한 자아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 일관적이고 연속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기만 하다. 망각은 기본이다. 기억의 순서는 쉽게 뒤죽박죽 된다. 지나간 일을 턱없이 미화하기도 하며 부정적인 면만을 강화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의 침입 때문에, 사는 동안 기억의 역사는 쉼 없이 재구성된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우리는 평생 동안 기억과 씨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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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앞서 언급한 기억의 속성들을 전제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음대로 지울 수 있다는 재미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에는 가장 큰 행복을 선사하는 사랑의 기억들이, 헤어진 이후에는 돌연 가장 가슴 아픈 기억으로 급변하기 때문에 대개 사람들은 사랑한 기억을 애써 잊으려 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 조엘(짐 캐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려 한다. 하지만 기억의 심연으로 파고들수록 클레멘타인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또렷이 재현된다. 조엘은 결국 기억 삭제 중지를 요청하게 된다. 사랑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기억 회로 속에서 도망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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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공드리 감독의 감각적 연출은 조엘의 기억 회로 속 여행을 탁월하게 시각화한다. 꿈같은 조엘의 여정을 함께 하는 동안, 관객들은 자신이 경험한 만남과 이별의 서사를 반추하며 과연 내가 조엘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지 고민에 빠질 것이다. 사랑한 기억을 말끔히 지울 것인가, 아프더라도 간직할 것인가. 시작의 설렘, 함께라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분명 있지만 다투고 서로 상처 주었던 아픔까지 끌어안을 수 있을까? 사랑이 식어가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사랑했던 사람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동안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가,
사랑의 기억을 사랑하는 것인가?
사랑의 기억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지극한 자기애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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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기억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지다 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원제('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가 의미하는 것처럼 '영원한 햇살(운명적 이끌림)'이 사랑의 티끌들로 채워져 갈 '티끌 하나 없는 마음'을 비추는 순간, 새로운 사랑의 여정이 시작된다.


#2.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위한 시(詩)


[눈이 담은 겨울]

김태혁


그날은 눈이 내렸어요

쏟아지는 폭포수마냥 엄습해와

따갑게 내 살갗을 건드리는,

저 먼 태양계의 중심에서부터

날아온 빛의 편대비행을 따라

그날엔 눈이 내렸어요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만큼의 무게로

그날 내린 눈들은

처언처언히 그리고 조금씩

하염없이 쌓여갔어요

너무나 뜨거웠고 너무나 눈부셨던

그 겨울날

꿋꿋이 의연하게 걸어와

내 마음의 살갗을 건드렸던

그날의 새하얀 눈은

바로 당신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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