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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옥잠 말고 나무가 되고 싶었던 중년 남자의 이야기

영화 <어쩔 수가 없다> 리뷰

by 김태혁

"눈뜨면 환갑이다."

필자가 마흔이 된 해부터 친구들에게 농반진반으로 자주 하는 말이다. "시간이 유수 같다", "시간이 쏜살같다"와 같은 오래된 속담들이 어느 순간 진부하게 느껴져서 속절없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고안해 낸 문장이다. 아직도 20년 전 대학 신입생 후배들을 환영하는 새터에서 나의 얌전한 절친이 돌변하여 소주병 나발을 불었던 장면이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히 기억나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중고등학교나 대학교 동창을 만나면 이미 무수히 반복했던 옛날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것이 가장 재밌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불안감을 부추기면서 바싹 마른 늦가을 낙엽처럼 버스럭거린다. 이럴 때 새삼 깨닫는다.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이제 얄짤없이 대한민국의 중년이다.'



'깐느박'에서 '베니스박'이 될 뻔했던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엇박자 유머라는 배양토에 과장된 인물과 설정이 뿌리내린 코미디다. '박찬욱 영화' 하면 떠오르는 뛰어난 미술과 유려한 카메라워크, 쉽사리 예상하기 어려운 독창적 편집, 부조리함을 극대화하는 음악은 변함없이 박찬욱의 인장을 아로새긴다.

사양길에 접어든 제지 회사의 중간 간부로 일하며 남부러울 것 없는 4인 및 2견 가족을 일군 중년 남자 '만수(이병헌)'가 느닷없는 혹은 예견된 실직으로 궁지에 몰리자 재취업 경쟁자들을 살해할 결심을 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좌충우돌 소동극을 벌인다는 것이 <어쩔 수가 없다>의 줄거리다.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많을까, 어떻게든 다른 살 길을 찾는 사람이 많을까? 현실에서 전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병헌의 탁월한 연기 덕분에 '만수'라는 인물이 대한민국 어딘가에 실존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게 되지만 만수는 철저히 영화적인 혹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캐릭터'다. 만수는 부레옥잠과 같은 부표 식물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삶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는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제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살고 싶어 한다. 이러한 만수의 성향은 식물에 대한 사랑 혹은 집착에서 잘 드러난다.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을 자초한다는 것이 만수의 아이러니다.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복기해 보면 그는 사실주의 영화를 만드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쩔 수가 없다>도 한국의 혹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살풍경보다는 만수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개별적 상황의 희극성이 돋보인다. 곤궁한 사람이 자신처럼 어려운 형편의 타인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떠오르게 하지만 <기생충>보다는 덜 구성적이고 더 표현적이다. 필자는 두 작품의 우열을 논할 만한 능력이 없다. 박찬욱과 봉준호는 서로 다른 영화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쩔 수가 없다>의 근본이 코미디라고 해도 여느 영화처럼 동시대의 징후들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본 중년 남자 관객 중 상당수는 필자처럼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극중 만수가 현재의 나 혹은 근미래의 나와 겹쳐 보이고 '나라면 가족을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도 모자라 '과연 나는 AI와 로봇이 빼앗을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나?'라며 근심하다 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가운데 어느새 엔딩 크레디트마저 종료되고 극장에는 조명이 켜진 후 청소 노동자께서 부지런히 비질을 하실 것이다.

한편, 주말에 영화를 즐긴 대다수의 관객은 월요일에 출근할 것이다. 만수처럼 자신의 마지막 출근일을 모른 채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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