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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혁 Dec 02. 2018

[절찬 상영중] 부탁 하나만 들어줘

막장이란 무엇인가?

희곡, 소설, 영화처럼 등장인물, 내러티브, 스토리를 갖춘 예술에서 소위 '막장'이란 무엇인가? 먼저 '막장'의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보자. 녹색창에 물어본 결과, 흔히 우리가 '막장' 드라마라고 할 때의 '막장'은  '막장(-場)'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즉, "1. 마지막 장을 뜻하는 말로, 특정한 상황의 마지막 장에 다다른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 인생을 갈 때까지 간 사람 또는 그러한 행위를 꾸며 주는 말"이다. 행위자인 사람에 초점을 맞춘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막장' 인물이 '막장' 짓을 하는 극이 '막장극'이다. 물론 '막장'의 의미는 "갱도의 막다른 곳"일 수도 있겠다. 이런 풀이도 의미가 통한다. '인물의 처참한 끝'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캐릭터, 소재, 설정의 '파격성'을 막장의 핵심 기준으로 삼는다면, 막장극의 원조를 찾기 위해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기원전 429년,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이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초연을 본 관객들은 얼마나 경악했을까? 잘 알려진 대로 <오이디푸스 왕>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니까. 하지만 우리는 <오이디푸스 왕>을 '명작'이라고 일컫지, '막장'이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 인류가 향유할 이야기의 고전으로 칭송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여타 다른 막장들, 이를테면 드라마 <아내의 유혹>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오이디푸스 왕>에는 있고, <아내의 유혹>과 같은 막장에는 없는 것을 네 가지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어처구니 없는 전개를 배척하는 '치밀한 개연성', 휘발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진한 카타르시스',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형상화하는 정말 '매력적인 등장인물'. 이 네 가지를 다 갖춘 이야기는 매우 희소하다. 사실 넷 중 하나만 설득력 있게 표현해도 훌륭한 이야기라고 할만하다. 

그렇다면 캐릭터, 소재, 설정이 매우 파격적인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막장인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이드(id)는 막춤을 춘다. 'fxxx'이 하는 말의 절반에 가까운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는 '병적인 거짓말쟁이(pathological liar)'다. 얌전해 보이는 스테파니(안나 켄드릭)는 본능적 욕망을 제어하려 노력하긴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두 여자 주인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숀(헨리 골딩)은 착한 것 같지만 여자의 유혹 앞에서 늘 속수무책이다. 이 영화의 미스터리 플롯을 지탱하는 중요한 변곡점마다 어김없이 살인이 기거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단순 막장극으로 치부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이 여성 캐릭터를 능수능란하게 조율할 줄 아는 폴 페이그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전작 중 멜리사 맥카시가 스파이로 출연한 영화 <스파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서 에밀리와 스테파니는 비록 막장 짓을 많이 하긴 하지만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이야기 전개는 일견 황당무계하지만 캐릭터의 특성을 함께 고려해보면 개연성에 아주 박한 점수를 주긴 어렵다. 인간 본성에 대한 '웃픈' 해설과 유머는 영화에 세련미를 더했다. 이 정도면 명작은 아니더라도 '웰메이드 막장극'이라고 불러줘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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