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끝을 잡고
'감(感)'
살면서 나도 모르게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다. 예를 들어, 통화 중 상대방의 목소리가 잘 들릴 때 '감이 좋다'라고 하고,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결과를 미리 예상해보면서 '이번엔 감이 좋다'라고 하기도 한다.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면 '감 잡았어!'라고 외친다. 불길함이 엄습하는 순간에는 '감이 안 좋아...'라며 말끝을 흐리게 된다.
영화 <저니스 엔드>는 '감이 안 좋아...'라는 독백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인물들의 표정으로 시작한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어느 최전방 참호를 사수해야 했던 영국군에겐 불타는 용맹과 승리를 향한 강철 같은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야전에서 몸을 숨기면서 적과 싸우기 위하여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를 뜻하는 '참호'는 진퇴양난에 빠진 군인들의 안절부절을 극대화하는 공간이다.
참호에서 나가는 즉시 적군의 총알이 빗발칠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쉽사리 참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지루한 눈치 싸움이 이어지게 되고, 교착 상태에 빠진 전장은 총성 대신 병사들의 한숨소리로 가득 찬다. 지척에 적이 있고 당장이라고 교전이 시작될 듯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곳에서는 참담한 대립의 끝이 도대체 언제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겨울 빙판길에서 차바퀴가 헛돌듯이 교전 전의 고요가 헛도는 참호에 몸을 의탁해야만 했던 군인들의 내면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전쟁터였을 것이다. 그들은 질척질척한 참호를 벗어나는 순간에 펼쳐질 생지옥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상상해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국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언젠가 온다는 것. '참호전'은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술일지도 모른다.
영화 <저니스 엔드>는 승자의 역사를 칭송하거나, 전투의 스펙터클을 과시하거나, 전쟁의 폭력성을 부각하거나, 전쟁을 희대의 러브스토리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다. 다만 참호에 처박힌 인물들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그들의 정신이 시들어 가는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전쟁의 끝을 잡고 있는 인간의 불안한 표정이 제일 절실한 전쟁 반대 구호가 될 수 있다. 영화 <저니스 엔드>는 전쟁의 잔인함을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반전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들과 다른 길을 가면서도 반전이라는 동일한 목적지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