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대화가 머무는 풍경
어느 열차 안.
사소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 때문에 다투는 중년 부부가 있다. 셀린(줄리 델피)은 이 부부가 일으키는 소음이 독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자리를 옮긴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있던 제시(에단 호크)는 통로 건너편 자리로 온 셀린에게 눈길이 간다. 몇 번의 시선 교환 후 제시가 셀린에게 말을 건다.
무슨 책 읽어요?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영화를 하나의 '연애학 개론서'라고 하자. 우리는 <비포 선라이즈>가 시작하자마자 중요한 연애 팁을 배운다.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이것은 우기기나 헛소리가 아니다. 진심이다. 셀린과 제시의 탁월한 미모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무엇이든 책으로만 배우면 망한다지만, 독서는 성공적인 연애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풍부한 독서는 재밌고 알찬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줄곧 눈빛만 던지는 것은, 감나무 아래에서 홍시가 입으로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호감 가는 사람이 생기면 용감하게 말을 던져야 한다. 말을 걸었으면, 서로 지루하지 않도록 대화를 계속해야 호감이 상승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셀린과 제시는 열차 안에서, 그리고 비엔나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눈다.
비엔나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녹아든 사랑의 대화는 롱테이크가 초래할 수 있는 지루함마저 날려버린다.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현란한 편집이나 촬영 없이 두 청춘의 싱그러운 하루를 담담히 보여준다. 정제된 연출 덕에 <셀린과 제시가 함께 하는 비엔나 여행>이라는 다큐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사실 대본에 없는 것이 아닐까.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즉흥적으로 떠올려 주고받은 것은 아닐까.
자신들이 바로 셀린과 제시인 것처럼.
이런 즐거운 상상을 했다.
다시 영화 초반에 등장했던 중년 부부로 돌아가 보자. 아마도 권태기에 빠져 있었을 중년 부부는 서로 무엇이 그리 탐탁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몇 마디 주고받더니 바로 언성을 높인다. 중년 부부의 날 선 대화는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셀린과 제시가 주고받는 대화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시간이 흐른 후, 셀린과 제시는 어떻게 될까?
중년 부부처럼 변할지, 여전히 빛나는 대화를 계속할지 알 수 없다.
'내일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라고 하지만 사실 태양은 한 번도 뜨거나 진 적이 없다.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셀린과 제시가 다음날 해가 뜨기 전까지, 아니 날이 밝아오기 전까지 공유한 단 하루의 아름다운 시간.
이 젊음의 시간은 늘 필름 위에 존재할 것이다.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뜨겁게 데워줄 것이다. 멋진 연애의 시작이 바로 독서라는 사실을 일깨워 줄 것이다. 이것이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부린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