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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혁 Nov 12. 2020

[절찬 상영중] 나는보리

그 집에, 그 마을에 가고 싶다

   고래로 갈등은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갈등의 점층적인 고조와 개운한 해소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는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쾌감이다. 갈등은 ‘서로의 입장이 다름’을 전제하는 탓인지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갈등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장애인을 향한 차별적 시선이 연료가 되어 갈등을 대폭발시키는 순간, 주연 배우의 에너지가 응축된 명연기가 빛을 발하며 관객의 망막에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긴 걸작들이 있다. 필자에게는 더스틴 호프만,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레인맨>과 조승우, 김미숙 주연의 <말아톤>, 그리고 설경구, 문소리 주연의 <오아시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떤 영화는 거대한 갈등의 줄기를 도려내고, 평범한 일상 속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는 것만으로 관객을 사로잡기도 한다. 가령, 임순례 감독, 김태리(혜원 역) 주연 <리틀 포레스트>의 감흥은 격렬한 갈등의 해결이 아니라, 농촌에서 주인공 혜원이 보내는 사계절의 푸근한 풍경에서 샘솟는다. 각박한 도시에서 벗어나 정중동의 시골 마을에서 직접 캐고, 손질한 식재료를 요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혜원을 보면서, 영화는 갈등이 야기하는 수축 작용 없이 이완만으로도 오롯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김진유 감독의 <나는보리>는 봄철 산들바람이 부는 청보리밭의 풍광을 닮은 작품이다. 청정한 인물, 정물, 풍경의 조용한 어울림으로 따듯한 이완을 선사하는 <나는보리>는 기존 장애인 영화의 전형성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가족 중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보리와 청각 장애인 아빠, 엄마, 동생 정우로 구성된 보리네 가족은 장애인을 향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다. 보리네 가족이 사는 동네, 보리와 정우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아우르는 바닷마을 공동체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를 가로막는 벽은 베를린 장벽처럼 붕괴되어 있다. 보리네 가족에게 짜장, 탕수육 세트를 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중국집 사장님 은정 아빠의 비밀스러운 배려처럼,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보리네 가족을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인격체로 대우하며 가끔 작은 도움을 줄 뿐이다. <나는보리>는 “현실에도 정말 저렇게 착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존재할까?” 하는 의구심을 “진짜 있을 법해”라는 확신 혹은 ‘믿(고 싶)음’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여느 집처럼 보리네 집에서도 피곤한 아빠는 해가 중천이어도 자고 있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 아니면 때로 피자를 시켜 먹는 것이 최고의 외식인 보리네의 모습은 평범한 서민 가족과 다를 바 없다. 파고가 낮은 봄바다처럼 잔잔하던 보리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다른 인물들과의 심각한 갈등이 아니라 보리 자신이다. 엄마, 아빠, 동생처럼 자신도 소리를 잃는다면 가족들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리는 소리를 잃게 해달라고 계속 소원을 빈다. 물질을 하는 해녀의 귀가 잘 안 들린다는 얘기를 듣고 어느 날 바닷물에 뛰어든 보리는 구조된 후 들리지 않는 척 연기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혀를 끌끌 차지 않고 소리를 잃은 보리를 걱정할 뿐이다. 언제 진실을 말해야 좋을지, 보리는 내적 갈등 때문에 고뇌한다. 보리의 귀여우면서도 애처로운 거짓말이 이어지는 동안 변함없이 보리를 지지해주는 가족들은 관계와 소통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보리의 동생 정우는 "소리 듣고 싶기보다는 모두 수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수화가 오가는 침묵의 순간 속에서 만개하는 보리네 가족의 천진한 미소를 부러워할 가족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나는보리>에 쿠키 영상은 없다. 대신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갈 무렵 나오는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눈으로 듣고 있는 엄마, 아빠”라는 문장이 마음을 흔든다.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마틴 스콜세지에게 영광을 돌리며 인용했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금언(金言)이 <나는보리>에도 잘 들어맞는 것이 아닐까?
   가을, 겨울이 지나 보리가 굳게 뿌리내리고 무르익는 봄날이 오면 보리네 가족이 사는 그 집에, 그 마을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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