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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혁 Sep 12. 2021

비디오테이프 바다를 항해하던 소년의 ‘타이타닉’ 승선기

    어린 시절의 내게 영화란 곧 비디오테이프였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 난 틈만 나면 비디오 가게에 들렀다. 멋진 남자 배우들과 아름다운 여자 배우들이 강렬한 필체의 글자와 함께 포장지를 수놓고 있는 비디오테이프 박스들로 가득 찬 비디오 대여점은 내게 별천지였다. 그곳에 가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던 나무꾼이 된 기분이었다. 

    1998년 2월 20일.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봄 방학 때였을 것이다. 비디오테이프에 머물러 있던 나의 영화적 체험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발생했다. 영화 ‘타이타닉’이 한국에서 개봉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은 한국 개봉 전 이미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휩쓸고 있었고 한국에서도 개봉 직후부터 연일 한국 박스오피스의 역사를 새로 썼다. 폭발적인 흥행세 덕분에 ‘타이타닉’은 유례없는 장기 상영에 돌입했다. 그때까지 극장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나는 ‘타이타닉’만큼은 극장 상영을 종료하기 전에 꼭 극장에서 보고 싶었다. 세계 최고의 흥행작이었기에 나의 영화관에서의 첫 번째 관람 작품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나는 용돈이 거의 없었고 하릴없이 ‘타이타닉’이 비디오로 출시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당시 ‘타이타닉’의 필름은 전국의 지방 소규모 극장에 이르기까지 몇 달째 전국을 돌고 돌고 돌았다. 초특급 인기 가수의 전국 순회공연을 방불케 하는 대단한 퍼포먼스였다. 내가 살던 고향의 단관 극장에서도 ‘타이타닉’ 1차 상영을 종료했다가 다른 신작이 별로 인기가 없자 2차 상영을 시작했고 꽤 오래 2차 상영을 한 후 종료했다가 결국 3차 상영에 돌입했다. 그리고 3차 상영에서는 ‘3천 원’이라는 파격적인 티켓 가격을 제시했다. 과연 당시 ‘3천 원’은 얼마나 저렴한 가격이었을까? 

    당시 동네 비디오 대여점의 평균 비디오테이프 대여료가 신작 기준 비디오 1개당 2천 원이었다. ‘타이타닉’은 러닝타임이 3시간이 넘으므로 상, 하 편 2개로 나누어 비디오로 출시될 것이 확실했다. 그러면 상, 하 2개 대여료가 총 4천 원이 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단관 극장의 ‘타이타닉’ 한정 3천 원이라는 티켓 가격은 비디오테이프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저렴한 것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영화관으로 간다!’는 생각이 용솟음쳤다. 어머님께 이번에 ‘타이타닉’을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은 합리적인 소비의 모범 사례가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었고, 나는 3천 원을 손에 쥐었다. 난생처음 영화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설렘을 연료로 삼아 힘차게 발진하는 로켓과 같았으리라. 

    멀티플렉스가 영화관의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던 1998년, 당시 내 고향 영화관의 풍경은 저 혼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단관 극장이므로 당연히 상영관은 하나뿐이었고, 오랜 세월 동안 별다른 개보수 없이 유지되어 왔기에 살짝 쿰쿰한 냄새가 상영관을 채우고 있었다. 팝콘 기계가 없어서 큰 철제 용기에다 직원이 직접 팝콘 원재료를 넣고 볶아서 파는 팝콘은 제조 과정의 어설픔과는 달리 맛 하나만큼은 일품이었다. 

    3차 상영임에도 불구하고 상영관 안은 꽉 찼다. ‘타이타닉’을 반드시 극장에서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늦게나마 극장을 찾은 사람들과 일부 재관람 인원이 더해진 것 같았다. ‘타이타닉’의 오프닝과 함께 드디어 나의 영화관에서의 첫 번째 관람이 시작되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나는 영화 속에서 단 1초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냥 영화 보기를 좋아했을 뿐 영화 관련 지식은 전혀 없었던 내가 봐도 이 영화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 같았다. 나름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많은 영화를 봤다고 자부했던 나는 그때까지 영화를 보면서 운 적이 없었는데, 잭이 로즈를 두고 차가운 얼음바다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순간에 태어나 처음으로 영화를 보다가 울었다. ‘타이타닉’ 덕분에 비디오테이프 너머의 진짜 영화를 만나서 느낀 어마어마한 희열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한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 영화계가 엄청난 어려움에 빠져 있다. 특히 극장 수입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영화는 유독 더 큰 난관에 봉착했다. OTT 서비스들은 영화관의 존재 가치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굳이 영화관에서 비싼 돈 내고 영화를 볼 필요가 있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속도를 조절해야 할지언정 영화관의 항해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영화관만이 선사하는 몰입감 높은 관람은 스마트폰을 비롯한 그 어떤 디바이스도, 넷플릭스를 비롯한 그 어떤 동영상 서비스도 대체하지 못한다. 물론 영화관의 매출이 줄어드는 추세를 바꾸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도와 폭은 예상보다 작을 것 같다. 

    그리스 신화의 거신족 ‘타이탄(Titan)’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타이타닉 호는 안타깝게도 비극적으로 침몰했지만, 한국과 전세계 영화인들은 앞서간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 사람들을 감동시킬 작품을 영화관에서 계속 상영할 것이다. ‘Our cinema will go on’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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