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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혁 Aug 15. 2021

엄지공(嚴至公)주(Zoo)

'지'극히 '공'평하게 모두를 사랑했던 사업가 엄지공 씨 부고 기사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알고,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떨친 동물 애호가 엄지공 씨가 어제 향년 7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많은 행운을 누리고 살았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945년 1월 1일, 조국 광복의 여명이 어슴푸레 비쳐오던 새해 첫날. 유독 길고 큰 엄지를 두 개씩 가져 여섯 손가락 모두가 거의 동일한 길이와 크기를 가진 채로 태어난 엄지공을 본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 중 대다수는 엄지공의 '쌍엄지'를 흉하게 여겼다. 오직 엄지공의 어머니만이 이를 비범한 일이라 생각했고, 장차 아들이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릴 것이라 확신했다. 남들과 다른 손 모양이 아들의 장래를 망칠까 걱정한 엄지공의 아버지는 힘들게 얻은 아들의 얼굴만 보면, 아니 손만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란한 엄지공의 손가락처럼 '지'극히 '공'평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 모든 사람들을 먼저 아껴주다 보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에 엄지공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바로 '엄지공(嚴至公)'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엄지공은 기이하게 큰 '쌍엄지' 때문에 사람들과 잘 친해질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그는 부모님을 제외하면 말을 섞는 사람이 없었는데, 부모님은 입에 풀칠하느라 너무 바빠서 엄지공과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러한 성장 환경 속에서 엄지공이 사람보다 동물과 친해진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외로움을 덜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만약 엄지공이 개나 고양이처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동물들과 가까이 지냈다면, 개와 고양이 덕분에 사람들과 가까워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지공이 가장 좋아한 동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 두꺼비와 두더지였다. 엄지공이 유심히 관찰해 보니 두꺼비와 두더지의 발가락은 엄지공의 손가락처럼 크기가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그가 자연스레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꺼비와 두더지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친구라고 믿게 된 엄지공은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두꺼비와 두더지를 위한 지상낙원을 설계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주 많은 수의 두꺼비와 두더지가 모여 편하게 살 수 있는 동물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물이 잘 공급되는 큰 땅이 필요했다. 즉, 큰 돈이 필요했다. 

엄지공은 누구보다 빨리 돈 계산을 할 수 있다면, 누구보다 빨리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천진한 생각으로 주산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엄지공은 쌍엄지와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주판알을 튕길 수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그의 계산 속도는 금방 여기저기 소문이 났고, 엄지공은 곧 TV 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전국 방송에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해외 방송사에서도 취재할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엄지공은 유명세로 벌어들인 돈을 종잣돈 삼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두꺼비를 모델로 한 주류회사와 두더지를 모델로 한 과자회사를 세워 승승장구했다. 어른과 아이 모두 '지'극히 '공'평하게 사랑하고자 한 그의 인생 철학이 주류회사와 과자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손자는 물론 증손자까지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엄지공은 
결국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모든 사람들을 아낌 없이 사랑하고자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끝내 어린 시절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엄지공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대신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두꺼비와 두더지가 주인공인 동물원 '엄지공(嚴至公) 주(Zoo)' 설립했다. 동물원 입구의 커다란 철제 대문 양쪽 위에는 쌍엄지 모형이 매달려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엄지공은 평생동안 모든 일과 사람에 '지'극히 '공'평하고자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엄지공(嚴至公) 주(Zoo)'는 오직 그 자신만을 위한 공간으로서 수만마리의 두꺼비와 두더지가 편안히 뛰놀 수 있는 수십만평의 습지와 땅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다만, 사람들이 동물원에 가면 만나기를 기대하는 호랑이, 사자, 기린, 코끼리 등 인기 동물들도 한 쌍씩은 들여왔다. 그래야 사람들이 '엄지공 주'에 찾아와 자신이 사랑하는 두꺼비와 두더지에게도 눈길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조금은 이상한 이 동물원에 들러 엄지공의 쌍엄지를 잠깐 떠올리고, 멋진 동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두꺼비와 두더지가 있는 구역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엄지공은 좋았다.  

기이하고 신나는 인생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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