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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Sep 27. 2016

‘설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남자인 이유

Movie Appetizer#24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선택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남자
9·11을 소환하고 치유하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이하 설리)을 만든다고 했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영화의 소재가 2000년대 이후 인기 있는 배우에서 위대한 감독 대열에 들어선 이후, 그가 보여줬던 세계와 많이 동떨어진 지점 같았다. <미스틱 리버>, <아버지의 깃발>, <밀리언 달러 베이비>, <아메리칸 스나이퍼> 등 상처 입고 돌아온 남자들의 이야기를 해왔던 그다.


<설리>는 비행기 사고에서 155명이 기적적으로 생존한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이런 사건을 영화로 만든다면 재난 영화가 적합해 보인다. 재난 앞에 모두를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다른 감독이 연출했다면, 크게 의문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선택했다면 다르다. 결점이 없는 해피 엔딩을 보여준 설리 설렌버거에게서 이 감독은 무엇을 본 것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남자

이미 말했지만, 설리(톰 행크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선택한 남자들과 어딘가 좀 다르다. 평화롭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유년기에 납치된 적이 친구에 관한 기억(미스틱 리버), 2차 세계 대전(아버지의 깃발), 이라크 전쟁(아메리칸 스나이퍼) 등 악몽과도 같은 사건을 겪고 돌아온 남자가 그 기억에 얽혀 현재에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야기다. 특히 전쟁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엔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고 귀환한 남자가 등장했었다. 이들은 타인이 영웅이라 부르지만, 자신은 과거에 묶여 번민하고 고통받는 남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설리>엔 어떤 남자가 있을까. 설렌버거 기장은 투철한 책임감으로 155명의 인물을 구한 ‘영웅’이다. 대중은 그에게 고마워하고, 열렬히 환호하며 그가 이룬 기적에 열광한다. 2차 대전, 이라크 전쟁 등 살상의 나선에 묶여 있지도 않고, 그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은 결과이기에 설리는 상처라는 것을 받지 않은 인물이다. 상처 보다는 명예로운 훈장을 얻은 인물에 가깝다.

설리는 해피 엔딩을 만든 영웅이다.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전작의 남자들과 겹칠 게 거의 없어 보인다. 이 남자에게 얽힐 트라우마 같은 게 있다면, 추락 당시의 공포와 비행 공포증 정도가 있을 것이다. 감독은 그의 공포증을 보여주는 심리극을 만들고자 했던 걸까. 과연 설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남자들과 겹쳐지는 지점은 어디일까.



설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남자인 이유

<설리>에서 비행가 사고는 (의외로) 초반부에 배치되어 있다. 심지어 영화는 비행기 사고 뒤의 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재난사고의 긴박한 상황을 극대화된 긴장감과 스펙터클 등으로 전시하는데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게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그래서 카메라는 비행기 사고의 순간을 재난 시의 매뉴얼을 보듯 비교적 건조하고, 빠르게 훑고 지나간다.


카메라가 선택한 초점은 설리 설렌버거 기장의 죄책감이다. 그는 자신이 했던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사람들을 구했다’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험하게 했다’는 데서 그의 고민과 자책은 시작된다. 결과만 생각하지 않고 그 과정에 질문을 던지며, 그 사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남자. 대중은 그 일을 감동적인 일·기적이라 표현하지만, 그에게 그 사건은 피할 수도 있던 일 같다. 영화를 통해 미디어가 만든 영웅 설렌버거 기장과 상처 입은 남자 설리의 간격을 느끼고, 함께 고뇌해보자. 이 남자가 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남자로 선택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9·11을 소환하고 치유를 시도하며

<설리>는 미국에서 9·11주간에 개봉을 했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행기 사건이 일어났던 주에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다룬 영화가 개봉한 것이다. 영화에서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히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꽤 직설적으로 그 당시 테러를 소환하는 효과가 있다. 그 아픔을 거대한 아이맥스의 스크린(이 영화는 분량 대부분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에서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감독의 선택이 놀랍다.


만약, 지금의 국내 영화계에서 이런 재난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재난 상황의 급박함과 그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 그리고 이 위기를 용기 있게 해결할 정의로운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감동과 신파 코드가 넘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사고를 소환해 기억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아픔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런 영화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나쁘게 말하면, 노골적으로 사고를 이용한 것이고, 사고와 그 이후의 세상에 대해 영화가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게 연출을 했다는 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노련함이자 성숙함이다.



일부는 <설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중 가장 평범하다고 말한다. 어떤 의도로 이런 평가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영화를 꽤 정확히 표현한 말이다. 감독은 영웅이 등장하는 극적 서사를 최대한 피했다. 이 영화에 영웅은 없다. 대신 설리라는 ‘일반인’의 책임감과 그가 해야 했던 일이 있다. 기장으로서 해야 했던 당연한 행동은 피해를 최소화했고, 덕분에 사고는 기적이 되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재난이라는 소재의 자극을 최소화하는 대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남자의 행동을 최대한 묵묵히 따라간다. 이 영화는 평범했어야 했다.


설리와 함께 부각되는 것은 재난 앞에 구조를 위해 힘썼던 사람들이다. 관제탑 직원, 배의 선장, 경찰 등은 위기의 상황 앞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정확히 해낸다. 재난 앞에서 작동하는 시스템과 그 속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들의 협동과 협조가 기적을 이뤄낸 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엔 유독 성조기가 많이 등장했고, 다양한 의미로 다가왔었다. <설리>의 성조기에서는 미국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듯하다. 사실, ‘애국심’이라는 것이 영화의 지배적인 정서일 때 매우 불편할 경우가 생기고는 한다. 하지만 그가 <설리>에서 보여준 미국은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국가다. 최근의 지진으로 또다시, 국가 재난 시스템의 무력함을 느낀 타국의 한 사람으로서 이 영화는 부러웠고, 씁쓸했다.


이 영화에 영웅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영웅들은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역할을 해낸,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9·11의 아픈 기억이 소환되는 계절에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 날의 아픔 이후 우리는 더 뭉쳤고, 성숙해졌기에 허드슨 강의 기적을 이뤘습니다. 여러분이, 또 우리가 영웅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두 번의 9·11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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