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화 일기#012 아메리칸 스나이퍼

국가의 승리, 인간의 패배

스나이퍼가 오랜 시간 기다린 방아쇠를 당기고, 동시에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극단적인 슬로우 모션과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그리고, CG로 표현한 총알. 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연출입니다. 덕분에 이 샷은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유독 돌출되어 있고, 괴상했죠. 이 샷이 미적으로 우수하다는 게 아니며, 시각 테크놀로지의 화려함을 구현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유치하다고 느낄 정도로 낯설었죠. 감독이 총알을 붙잡아 두려고 애쓴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붙잡으려 했던 이 순간은 어떤 의미가 있었고, 왜 유독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을까요. 오늘 영읽남과 함께할 영화는 <아메리칸 스나이퍼>입니다.


스나이퍼와 양치기 개

어려서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은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양, 늑대, 그리고 양치기 개. 그리고 아버지는 카일이 불의에 맞서 양을 지키는 양치기 개가 되기를 바랐죠. 덕분에 카일은 스나이퍼를 양을 지키는 수호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국가가 공격을 받았기에 전장으로 향했고, 자신의 양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호자라는 긍정적인 이름과 달리 스나이퍼라는 역할 안에서 사람을 죽임으로써 발생하는 윤리, 도덕 문제는 무시됩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가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의 차이로 이어지겠죠. 관객은 크리스 카일을 사람을 죽이는 악마이자 살인에 대한 책임을 방관하는 군인으로 볼 수 있고, 국가와 전우를 위해 홀로 짐을 진 고독한 영웅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남자, 크리스 카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총잡이 역할로 명성을 얻었고, 보수주의자이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저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저는 한국전에 반대했습니다. 그 뒤로는 시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베트남전도 반대했습니다.” 등의 의견을 밝혀왔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의 전쟁영화에서는 총탄이 오가는 긴박함과 무기의 화력에서 오는 액션보다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엔 전쟁을 겪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있었죠.


<아메리칸 스나이퍼>도 적을 죽이는 쾌감을 극대화한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단골 테마인 상처 입고 돌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이며,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크리스 카일은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고서도 집으로 가지 못하죠. 그가 생각한 늑대가 없어졌지만 갈 곳이 없는 아이러니함. 아니, 어쩌면 늑대와 대면하기 전에 존재했던 ‘그’라는 인간 자체가 이제 없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귀환한 그는 가정에 섞일 수 없었습니다. 가정이 있지만, 가장인 자신은 부재한 아이러니에 빠져버렸죠.


그리고 전장을 벗어난다고 해서 그의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장 밖에서 그의 삶은 썩어 문드러져 있죠. 복귀한 크리스 카일의 표정은 공허했는데, 그는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고 정착하지도 못합니다. 전쟁이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거죠. 게다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도 어딘가 불안함이 보입니다. 이런 장면들에서 전쟁이 망가뜨린 가장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었죠. 게다가 그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movie_image-5.jpg

이처럼 클린트 이스트 우드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봉인되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자주 그려왔습니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프란체스카,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리엄 머니, <미스틱 리버>의 세 소년은 과거의 사건에 묶여있고 이는 끊임없이 현재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칸 스나이퍼>도 이 영화들의 연장에 있죠.


오랜 치료 끝에 크리스 카일은 가장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참전용사가 쏜 총에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의 거대한 비극, 영웅서사시를 완성합니다. 그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썼던 도구, 그리고 그가 지켰고, 지키고 싶었던 전우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거대한 모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쟁이 남긴 결과입니다. 살아 돌아온 자도 결국은 전장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고통 받다 맞이하는 최후.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대목이죠. 어쩌면 이런 결말이 전쟁을 겪은 미국이(혹은 미국의 보수가) 마주한 공황과 좌절, 실패가 아닐었을까요.

movie_image-4.jpg


목표의 상실과 찾아오는 방황

다시 최초에 언급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크리스 카일이 최후의 한 발을 쐈을 때, 화면이 정지합니다. 그리고 고요해지죠. 이때, 그의 승리를 축하하고,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음악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적이 쓰러졌음에도 쾌감을 느끼기 어렵죠. 분명, 주인공은 적을 처리했고, 바라던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가 전쟁의 끝을 의미할 수 있을까요? 혹은 크리스 카일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전장의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듯 모래 폭풍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버려진 총만이 전장에 남아 또 다른 스나이퍼를 기다리고 있죠. 관객도 알고 있습니다. 모래 폭풍이 걷힌 이후에도 총성은 계속될 것이며, 남겨진 총을 갖게 될 인간 역시 전쟁 속에 소모될 것임을.


앞서 던진 질문에 답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왜 이런 이질적인 장면을 연출했을까요. 언급한 이질적인 장면에서 감독은 승리의 짜릿한 순간을 조명하지 않았습니다. 짜릿함보다는 허무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죠. 영읽남에게 저 장면은 크리스 카일을 전장에 붙잡아둔 목표, 그가 목표를 유지하고 있었던 순간, 그가 이 전쟁을 유의미하다고 믿었던 신념 및 시간이 소실되는 순간을 붙잡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가면 크리스 카일은 밀려오는 공허함에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요.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복수는 끝났지만 그다음이 없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최고의 비극이자,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movie_image-6.jpg

목표를 상실한 크리스 카일을 보며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가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오사마 빈라덴 체포 작전을 다뤘습니다) 작전을 끝내고 귀국하는 마야(제시카 차스테인)에게 조종사가 어디로 데려갈지를 묻지만, 그녀는 명확한 목적지를 대답하지 못하죠. 그녀 역시 목표를 잃어버린 존재이기에 방황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크리스 카일과 마야는 닮았습니다. 이들은 테러 이후 슬픔과 분노를 해소할 타겟이 필요했던(그리고 당위성도 충분했던) 미국인의 심리를 보여줬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복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포기하고서 타겟에 매달리죠. 그리고 두 사람은 많은 시간을 소모했지만, 결국엔 작전을 성공으로 끝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환호하지 못하죠. 목표를 이뤘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죽었던 동료가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그들을 슬픔과 분노에서 버티게 해준 목표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죠. 복수는 끝났지만 밀려오는 거대한 허무와 허탈함. 이제 이들은 그리고 미국은 무엇을 타겟으로 설정해야 할까요.

movie_image-1.jpg


'전장'이라는 나선 위에 선 남자

크리스 카일은 '레전드'라는 칭호를 얻지만, 전쟁과 살육의 나선 위에서 끝없이 맴돌아야 했습니다. '당한 것이 있으면 끝장을 봐라'라는 아버지의 말에 충실했고, 덕분에 그 자신의 삶이 끝장이 났죠. 그는 전쟁, 피가 튀는 전장에서만 영웅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을 붙잡아둔 살인의 나선이 정의일 수 있는 곳은 전장뿐이었으니까요.


마지막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장면은 크리스 카일이 국가라는 이름 아래에서만 영웅일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참한 장면으로 읽힙니다. 수많은 미국인이 비윤리적 행위를 그에게 맡겼고, 덕분에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지켰습니다. 크리스 카일이 국가, 그리고 많은 가장을 대표해서 손에 피를 묻힌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떠나는 그에게 보내는 성조기는 고마움인 동시에 미안함의 의미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크리스 카일은 상처 입고 돌아온 남자였으며 가정이 있음에도 돌아갈 곳이 없던 방랑자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엔딩 속의 무수히 많은 미국의 국기 아래서 허무함과 공허함, 상실감 그리고 한 남자의 패배와 슬픔을 느꼈다면 저는 심각한 이스트우드의 옹호자일까요.

매거진의 이전글영화 일기#011 록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