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의 역사에서 찾은 리더의 덕목
패배의 서사를 선택한 영화
정치와 현실의 거리감울 보여준 구성
영화가 말하는 리더의 덕목
<남한산성>은 건조한 영화다. 국내 상업 영화에서 자주 보던 웃음/감동 및 신파적 요소가 적다. 그렇다고 민족적 자긍심을 추구하는(일명 국뽕) 영화도 아니다. 그보다 더 독특한 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주인공의 굴욕이라는 순간에 있고, 조선의 패배에 있다는 점이다. 최명길(이병헌)이 원하는 걸 쟁취하고 승리하는 듯한 <남한산성>은 최명길의 눈물, 즉 그가 모시던 리더 인조(박해일)의 패배로 귀결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황동혁 감독은 인조의 삼배구고두례로 끝난 병자호란을 통해 뭔가를 말하고자 했다. 실화를 다룬 <도가니>를 통해 영화가 현실에 영향을 주고(도가니법) ‘뮤비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보인 그는 역사적 사실들을 조합해 자신의 목소리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역사적 사료를 그저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 차가워 보이는 <남한산성>은 의외로 매우 주관적인 관점이 많이 투영된 뜨거운 영화다.
시간의 경과를 담은 <남한산성>의 전개를 해체해보면, 신하들의 논쟁-임금의 결정(원인)-병사들의 전투(결과)가 순환하는 구성을 가진다. 왕이 중심이 되는 정통 사극 영화 및 드라마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개이며, 시청자와 관객에게 낯설지 않은 전개다. 정치인들의 정치, 위로부터의 정치가 이뤄지던 조선의 정사(政事)를 다루는 일반적인 구성으로 볼만하다. 그런데 <남한산성>이 익숙한 전개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사의 재연이 아닌, 어떤 ‘거리감’의 표현이었다.
<남한산성>의 이런 구성은 임금의 정치와 백성의 삶 간의 거리를 부각한다. 영화에서 인조는 백성 및 전장의 실황을 직접 보지 않는다. 신하를 통해 전해 듣고, 민초들의 삶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이 결정이 민초의 삶과 죽음은 가른다. 이런 인조의 정치를 통해 탁상공론과 현실의 거리감, 명분과 실리의 차이, 그리고 임금과 백성 간의 괴리감을 엿볼 수 있다.
영화는 인조의 정치와 백성의 현실을 대조하며 당대 정치인들의 정치가 얼마나 사상누각인지, 실질적 효율성과 동떨어져 있는지, 백성을 고려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간격은 영화의 공간을 대조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인조가 머무는 공간은 붉은 톤으로 온기가 느껴지게 비췄고, 백성들은 차가운 톤으로 한기가 느껴지게 담았다. 추운 겨울에 각자가 놓인 상황을 색이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거리감은 인조의 정치적 무능함과 무용함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을 넘어 더 멀리 나아간다.
지속해서 앞서 거리감을 조명한 <남한산성>은 조선을 정치인과 백성으로 나눠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영화엔 ‘이 나라는 전하의 것이니’라는 대사가 있는데, 이를 통해 왕이 곧 조선이라는 윗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왕과 백성을 구분해서 보여주고, 조선이라는 나라와 백성이 왕과 동일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되묻는다. 병자호란의 굴욕은 누구의 굴욕인가.
병자호란은 패배한 전쟁이며, 굴욕의 역사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인조의 삼배구고두례가 조선 전체의 굴욕이 아니며, 한 임금과 정치인들의 명분에 타격을 준 사건일 뿐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임금 개인의 굴욕은 백성의 패배와 굴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물론, 역사적으로 다양한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이 입은 피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남한산성>이 해석한 인조의 삼배구고두례는 그랬다. 이는 마지막에 나루(조아인)가 봄을 맞아 웃으며,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 하나의 컷, 하나의 씬으로 보강된다. 인조는 무릎을 꿇고, 최명길은 울었지만, 서날쇠(고수)와 나루 등 민초들은 활기찬 삶과 웃음이 넘실대는 봄을 얻었다. 인조가 한 번 굴욕을 당함으로써 백성은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굴욕은 참으로 민본주의적인 선택이라 할 만했다.
황동혁 감독은 건조하고, 단순한 역사의 재연처럼 흘러가던 영화의 마지막 씬을 통해 현실에 뚜렷한 메시지를 보냈고, 원하는 바를 외쳤다. <남한산성>은 굴욕의 역사를 통해 굴욕의 리더쉽을 말한다. 자신의 머리를 조아려서라도 백성에게 봄을 안길 수 있는 정치, 백성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안길 수 있는 지도자에 관해 생각하게 했다. 인조를 새롭게 바라보고 재평가하자는 것과는 다르다. 단지, 그 당시의 선택을 지금의 현실에 대입했을 때,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남한산성>은 명분과 의리에 집착해 현실을 외면했던 ‘위로부터의 정치’가 불러온 민초의 고통을 조명해, 리더 개인의 굴욕과 백성의 굴욕을 구분할 줄 아는 지도자를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정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했다. 인조는 (실제로 그랬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백성의 죽음을 두려워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왕좌가 누구로부터 받은 권력이고, 누구를 위한 명분인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했다. 이렇게 삼전도의 굴욕에서 황동혁 감독은 아래로부터의 정치, 백성을 바라볼 줄 아는 정치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남한산성>은 기획 당시, 대선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었던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끔찍한 생각이지만) 정말 대선과 밀접한 시기에 개봉했다면, 최명길과 김상헌(김윤석)의 관점에 관해 더 뜨거운 논쟁이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남한산성>을 관람하면서 최명길의 선택에 더 쉽게 몰입되었던 것은 아래로부터의 정치가 이 시대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지난 겨울에 학습한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을 바라볼 줄 아는 리더를 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