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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Jan 19. 2019

[말모이] 판수에게 '한글'은 어떤 의미였을까

영화 일기#073 말모이

<말모이>의 관람이 끝나고서 복잡한 생각이 객석을 떠돌고 있었다. 암울한 시대에 모든 걸 걸고, 한글을 지켰던 인물들 앞에서 느낀 경건함. 동시에 느낀 영화적 완성도를 향한 진한 아쉬움.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이야기 앞에서, 영화의 부족함을 향해 의문을 던진다는 건 껄끄러운 일이다. 마치, 그 역사 앞에서 불순한 태도를 가지고 서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말모이> 앞에서 이 영화가 별로라 말하는 건, 이상한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감독님, 왜 이 죄책감은 저의 몫이 되어야만 할까요.”


<말모이>는 기억되어야 할 시간을 소환해 지금의 관객에게 보여주고, 한글에 관해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영화의 선한 의도가 주목받는 영화로, 관람평에서도 고맙고 착한 영화라는 의견을 다수 볼 수 있다. 덕분에 영화의 결점은 일부 가려져 있는데, 손익분기점을 달성하기 힘들 것 같다는 시점에서, 이에 관해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말모이>는 어떤 점에서 아쉬웠을까. 엄유나 감독의 전작, <택시운전사>라는 비교 항을 두고서 생각해봤다.



<말모이>는 엄유나 감독이 각본을 쓴 <택시운전사>와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두 영화는 한 아버지가 돈 때문에 역사적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며 시작한다. 이 남자들은 폭력적인 권력의 부당함과 잔혹함을 목격하고, 소시민들과 함께 대업에 동참한다. 그러다 목숨 걸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후, 역사적 대업은 완성되지만, 주인공은 이름 없는 영웅으로 남겨진다.


<택시운전사>가 ‘김사복’이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했기에, 창작의 한계가 있었다고 하지만, 가상의 인물을 설정한 <말모이>는 비교적 자유로운 캐릭터 설정이 가능했다. 그런데도 김판수(유해진)가 엄유나 감독 전작의 인물과 상당히 겹친다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성공한 영화의 공식을 답습해, 안정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이번에도 각본을 쓴 엄유나 감독의 고유한 영화 세계로 봐야할까. 어떤 이유였든 이 자기복제가 실패했다는 게 중요하다.


더 좋은 아버지로 인정받기 위해 뛰어든 대업(사전 편찬 작업)을 보여준 <말모이>는 현재까지는 <택시운전사>(약 1,200만 관객 동원)만큼의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착하지만 실패한 영화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다양한 원인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연출, 연기, 편집 등 요소별로 느낀 아쉬움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하나의 게으름이 눈에 띈다. <말모이>는 한글에 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한글이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왜 소중한지 보여주는 데는 무관심하다. 한글의 소중함은 이야기가 아닌, 한 마디의 대사로만 전달될 뿐이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이를 에피소드로서는 풀어내지 못했다. 저 대사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저 대사가 김판수라는 인물을 변화시킬 동기로서 충분했는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지키고자 하는 인물들의 모임으로, 사전 작업이 목표인 단체지만, 김판수는 다르다. 그는 사전 편찬 작업에 목숨을 걸 만큼, 한글에 애착을 가질 기회나 이유가 없었다. 영화엔 김판수가 ‘왜 한글이어야만 하는가’를 고민하는 지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읽고 감동하는 장면이 있지만, 이는 한글의 소중함이 아닌, 문맹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데서 오는 기쁨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영화에서 김판수를 움직이는 건 한글에 대한 애정이 아니다. 대신, <말모이>는 감정에 호소한다. 류정환(윤계상)과의 우정, 그리고 순희(김예나)의 “나는 김순희가 더 좋은데”란 대사 등에서 김판수는 사전 편찬 작업의 당위성을 찾는다. 그 외의 당위성은 김판수라는 인물 밖에 있다. 아예, 영화 밖에 있다고 봐도 좋다. 객석의 관객이 가지는 ‘한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김판수의 행동을 이해하게 한다. 모든 한국 관객이 가질 ‘한글은 우리의 것, 소중한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 그리고 이를 지켜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등으로 영화의 부족한 김판수의 당위성을 확보하려 했다.



결론적으로 <말모이>의 류정환 및 조선어학회가 말하는 한글의 소중함은 김판수에게 일방향적으로 주입될 뿐 사유 되지 않는다. 영화는 이를 사유 될 필요가 없는 당연한 것이라 여긴 듯하다. 한글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이 없고, 그렇게 말할 리도 없기에 내린 결정이다. 다만, 이렇게 캐릭터가 사유하는 과정이 생략되면, 관객이 영화 속 이야기에 참여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판수의 행동에 이입하기 어렵고, 감동과도 멀어진다. 영화의 메시지에 동의하나, 이야기를 즐기지는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 관객이 남긴, ‘계몽적’인 느낌이 강했다는 의견에선 관객이 <말모이>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유사한 플롯을 가졌지만, <택시운전사>가 더 많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던 건, 역사적 사건을 체화하는 김만섭(송강호)이라는 인물에 관객이 이입했기에 가능했다. <택시운전사>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당시 시민들이 겪었던 아픔에 공감하게 하는 과정이 있었다. 시위를 싫어하던 김만섭이 그 시대와 시민운동에 관해 사유할 시간을 충분히 줬고, 그래서 관객은 그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말모이>의 유해진은 관객과 함께 뛰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관객이 목격한 건, 다른 일제강점기 영화에서 봐왔던 기시감과 익숙한 신파 코드였다. 이 영화는 관객이 이미 아는 한글의 소중함 외에 다른 고민의 시간을 주지 못한다. ‘한글’ 그 자체의 경건함에 너무 많이 기댄 게으름이 아쉬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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