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Feb 10. 2019

[리틀 포레스트] 잠시, 미뤄둬도 괜찮아

05화. 2018년 봄, 첫 번째 - <리틀 포레스트>

About Movie.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남쪽으로 튀어> 등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의 영화.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며, 한국에서는 이를 한 편으로 묶어 제작했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농작물의 재배 과정 및 싱싱한 재료로 한 끼를 만들어 먹는 과정을 정갈하게 표현했으며, 사계절의 풍경과 식문화 볼 수 있다. 도시의 느낌을 뺀 김태리, 류준열, 진기주의 담백한 매력을 볼 수 있으며, 여기에 시골의 정겨운 느낌을 잘 살리고 있어 ‘힐링’이 필요한 이들에게 권할 수 있는 영화. 키노라이츠 지수는 92.9%를 기록 중이다.


2018년 2월은 평창 올림픽으로 겨울의 온도가 뜨거웠던 시기다. 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을 향한 뜨거운 박수, 그리고 올림픽 정신을 훼손한 선수들을 향한 분노가 섞여 겨울의 한기마저 밀어냈었다.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에게서 뭉클함을 느꼈지만, 사실 경쟁에만 초점을 맞춘 매체의 모습엔 진저리가 났다. 특히 짜증이 났던 건, 타국 선수의 실수를 노골적으로 바라면서까지 자국 선수의 승리를 바라는 해설이다. 4년의 노력을 증명하는 무대 앞에서 누군가의 시간을 저주하는 것, 그게 올림픽 정신일까. 잔혹한 게임이 된 올림픽 앞에서 넌더리가 났다.

  

평창 올림픽이 끝날 때 즈음에 <리틀 포레스트>는 개봉했다. 마치, 올림픽에서 낙오한 이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여태 가졌던 부담을 잠시 잊으라 하고, 당신을 사로잡고 있던 문제를 잠시 미뤄둬도 괜찮다고 말한다. 영화의 주인공도 취업과 연애 등에 상처받은 ‘패자’ 혜원(김태리)이다. 도시 생활에 지쳐 고향의 시골 마을로 도피한 그녀가 사계를 건강히, 잘 먹고 잘 지내는 시간을 담았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쌓여 혜원은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농사를 짓게 된다.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곳

<리틀 포레스트>는 농촌 마을의 고요함과 순박함을 양껏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관객은 일상에서 가져온 짐을 잠시 내려두고, 혜원을 따라 농촌 곳곳을 누비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혜원이 자연 속에서 무공해 채소들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활력이 넘친다. 그리고 담백한 음식이 뚝딱 만들어지는 부엌은 영화를 더 풍요롭게 한다.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카메라 덕에 눈이 즐겁고, 싱싱한 채소가 요리되는 소리도 생생하게 담은 덕에 귀가 배부르다. 영화의 모든 요소가 급한 것이 없고, 관객을 느리게 흐르는 시간에 취하게 한다. 깨끗한 이미지가 선물하는 휴식,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농촌이라는 공간 외에도 다양한 친구들이 혜원의 치유를 돕는다. 작지만, 온기를 가졌기에 위로가 되는 강아지 ‘오구’부터 유년기를 함께 보낸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은 친구이자, 도시에서는 실종되어가는 이웃사촌으로서 그녀의 든든한 지원자가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엄마(문소리)의 기억이 부유한다. 혜원이 요리하는 과정은 엄마를 소환하는 의식처럼 보이고, 때로는 대결하는 구도로까지 보인다. 그렇게 혜원은 도시에는 없던 엄마의 손길을 느끼며 성숙해 간다. 이렇게 혜원은 시골의 풍만한 먹거리로 부족한 체력을 회복하고, 정겨운 만남과 기억의 소환으로 외로웠던 마음을 충전해나간다. 이들과 사계절을 보내면 영화가 끝난 뒤에도 돌아갈 곳이 생긴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리틀 포레스트>가 마치 고향처럼 자리 잡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시골이라는 환상성

냉정히 말하면, 혜원이 돌아온 시골은 현실에선 찾을 수 없는 공간이다. 특히, <리틀 포레스트>의 중심에 있는 도심의 청년 세대, N포세대라 불리는 이들에겐 지나친 사치로 보일 정도다. 혜원이 온 시골은 리얼리티라가 아닌, 현실에 없는 것들의 대립 항으로서 필름이라는 땅 위에만 존재한다. 그렇게 <리틀 포레스트>는 영화 그 자체로서 청년세대에게 ‘고향’이라는 역할을 해주려는 듯했다.


<리틀 포레스트>의 시골은 도시 생활에 지친 헤원을 위한 휴식처이자, 도시에 결핍된 것이 충만한 공간이다. 영화의 중간에 끼어드는 도시의 잔상은 혜원이 현재 있는 공간과의 대비를 위해 등장하며, 전혀 다른 이 두 공간 덕에 시골의 이미지는 뚜렷해진다. 덕분에 시골의 가치가 더 충만해진다. 임순례 감독이 담은 도시는 톤 앤 매너부터가 건조하고 차갑다. 뭔가에 짓눌리고, 어둠을 먹은듯한 빛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어 오래 바라보기에 갑갑하다. 어쩌면, 이것이 영화가 담은 리얼리티, 리얼한 세상이다. 그곳은 유통기한 지난 인스턴트 도시락과 남몰래 씹는 삼각 김밥이 배를 채우며, 거대한 냉장고엔 먹을 게 없다. 이와 비교해 시골은 태양광이 만드는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있고, 곳곳엔 싱싱한 제철 음식이 있으며, 끼니마다 아름다운 레시피로 만든 음식이 채우고 있는 완벽한 공간이다.


이곳은 완벽한 대체재이면서, 또한 완벽한 판타지다. 혜원은 자신이 도망 온 게 아닌,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혜원의 집 역시,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공간이며, 그녀의 부재 기간엔 봉인되어 있던 공간이다. 혜원이 문을 여는 순간, 그녀가 떠난 이후 멈춰있던 집의 시간이 다시 흐른다. 더 과장하면, 그녀가 문을 여는 순간, 멈췄던 이 시골 전체가 다시 움직이는 듯했다. 여기에 그녀의 친구들이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었고, 조금의 이질감 없이 그녀와 섞이는 걸 볼 때, 이 공간의 판타지성은 더 강화된다.



성장 영화 등에서 인물이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한 시절과의 작별을 뜻한다. 고향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나가는 순간, 인물의 성장은 시작되고, 고향의 노쇠화는 시작된다. 캐릭터의 성장만큼 고향은 바래간다. <레이디 버드>에서 레이디 버드(시얼샤 로넌)가 고향을 떠나는 순간은 사고뭉치였던 유년기와 단짝 친구와의 작별을 뜻했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서 과거의 자신을 벗어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녀에게 고향은 지도에는 있지만,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이와 비교해 <리틀 포레스트>의 고향은 지도에는 없지만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묘사되었다.


혜원의 집(시골)은 과거와 함께 박제되어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고, 인간관계마저 그 부재의 시간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또한 이곳에 온 혜원은 속세에서의 문제와는 완전히 작별한 모습마저 보인다. 고시라는 경쟁에서 초월한 모습, 생활비와 월세라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무던히 살아가는 모습,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 이상적인 안식과 건강, 힐링을 보장하지만, 이런 곳은 결코 어디에도 없는 곳, 유토피아 같은 곳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시골 생활의 아름다움을 말하지만, 결국 모든 게 판타지다. 낭만이 있을 법한 순간을 오려 붙인 영화이며, 이런 환상의 연장엔 시즌별로 찾아오는 관찰 예능 <삼시세끼> 등이 있을 듯하다.


필름의 환상성이 건네는 위로

<리틀 포레스트>의 판타지는 n포세대가 포기해야 했던 걸 쥐여주며 정점을 찍는다. 도심의 1인 가구, N포세대가 잊고 있던 재료의 생생함을 이미지와 소리로 전달한다. 때우고, 해결하는 끼니가 정성과 영양을 잔뜩 담은 음식으로, 그리고 그 느린 과정엔 유년기의 추억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 어떤 순간은 맛과 음식으로 기억되곤 한다. 그 기억을 음미할 시간을 이 영화는 준다. 그리고 포기해야 했던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함께 일하고, 위로하는 친구 관계, 그리고 N포 세대의 중심에 있는 연애 세포를 깨우기도 한다. 더블어 이 영화엔 큰 갈등이 없다.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포착하려 한 노력이 더 큰데, 이런 무자극의 일상은 스트레스와 자극뿐인 세상과 대비되고, <리틀 포레스트>를 판타지로 만든다.


<리틀 포레스트>는 대중 상업 영화의 전개를 배반한다. 헤원의 고민과 내적 갈등이 분명 있지만,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주인공을 방해하는 적과 장애물이 있지도 않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요소가 없는 편이다. 마치, 긴장, 스릴 등의 요소를 향해 ‘그런 농약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듯한 영화다. 그럼 영화는 어떻게 전개되는 걸까. 그저 사계절이 자연스레 흘러간다. 영화는 자연 속의 풍경과 먹거리가 조화된 일상을 바라보라 한다. 어떤 긴장도 없이 편히 보고, 쉬고 가라고 말한다. 이 휴식을 통해, 삶에서 잊고 있었던 것들이 떠오르는 신기한 순간을 만날 것이다. 잘 보고, 먹고 휴식하며 치료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가장 큰 건 시간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식물의 생장과정과 함께 사계를 느리게 담아낸다. 그리고 N포세대가 바삐 흘려보내고 있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음미하고 여유를 가져보라 권한다. 흘려버린 사계를 보고, 성장하는 식물처럼 자신이 어디쯤에서 얼마나 성장했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의미 없는 날씨와 계절이 없듯, 그대들의 인생에도 힘들지라도 버릴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절대 가져보기 힘든 걸 대리만족하게 하며, 잔인한 세상을 뒤로하고 영화가 건네는 위로와 위안이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라 이 영화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영화엔 온기를 가진 것이란 모두 위로가 된다는 대사가 있다. 온기가 없던 도시를 대비하는 대사였지만, 이 영화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판타지라해도 <리틀 포레스트>의 온기 덕에 큰 위로가 된다.

이전 04화 [셰이프 오브 워터] 물속에서 찾은 자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