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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Feb 17. 2019

[곤지암] 402호 귀신의 비밀

06화. 2018년 봄, 두 번째 - <곤지암>

About Movie. <기담>, <무서운 이야기> 등을 연출한 한국 호러 영화의 스페셜 리스트 정범식 감독의 영화.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한 영상을 보는 ‘페이크 다큐’ 형식을 잘 살린 연출이 돋보인다. 인물들이 직접 기록한 영상을 조합한 이런 형식은 ‘파운드 푸티지’라 불리기도 하며, 현장감을 잘 반영하고 있어 극영화임에도 리얼한 느낌을 준다. <곤지암>은 CNN이 세계 7대 소름 끼치는 장소로 선정한 ‘곤지암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개인방송을 하던 청년들이 겪는 기이한 현상을 담았다. 국내에서는 자주 볼 수 없던 형식과 괴담으로 유명한 장소가 만나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고, 놀라운 흥행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키노라이츠 지수는 63.3%를 기록 중이다.


공포영화의 미덕은 공포감의 조성과 숨 막히는 긴장감이며, 관객은 그 쫄깃함을 즐기기 위해 돈을 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뛰어난 공포 영화는 주인공들의 사연 및 소재에서 공포의 근원을 제시하고, 메시지와 주제 의식 등을 반영한다. <장화홍련>엔 개인의 심리 및 죄의식이라는 주제가 있었고, <여고괴담 2>엔 여학생들의 고민이 반영되어 있었으며, <알포인트>엔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메시지가 있었다. 이들은 무엇이 자라서 공포가 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하며 우리의 현실까지 돌아보게 하는 데까지 성공한 영화다. 찰나의 순간에 만들어지는 공포감이 촬영, 음향, 편집을 조합한 테크닉의 결과물이라면, 현실에 숨겨진 공포의 향을 퍼뜨리는 건 감독이 가진 세상을 향한 시선에서 비롯된다. 이들이 조화를 이룰 때, 그 공포 영화는 놀라움을 넘어 작품이 된다.



<곤지암>이 개봉했을 때, 팝콘이 사방에 튄 인증샷과 관객의 인상적인 관람평은 이 영화가 공포물의 역할을 잘 해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비록, 영화의 형식이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 <클로버필드> 등의 선구자에게서 빌려온 형식, 그리고 <혼숨>에서 이미 봤던 1인 방송의 구도와 그에 대한 통찰 등) 누군가에겐 과하게 흔들리는 영상이 거부감을 줬지만, <곤지암>은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기담>부터 악명 높았던 호러 연출 대가의 손길에 관객은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했고, 비수기였던 3월 말에 개봉해 26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이 영화를 좋은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곤지암>은 인간의 이기심과 어리석은 모습을 잠깐 보여주기는 했지만, 이 영화의 인물 및 서사만으로는 앞에 언급한 <여고괴담 2>, <장화홍련> 등의 작품처럼 큰 주제와 메시지로 묶어내는 건 역부족이다. 물론, <곤지암>을 한국 영화에서 지적되는 ‘원혼’의 사용, 클리셰 등이 없는 깔끔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한 많은 사연 없어도 충분히 무섭다 - 씨네 21 김현수 기자) 하지만 공포 이후에 생각할 뭔가가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느낀다. 극한의 감각적 체험 뒤의 허무함. 심장 박동수의 수직 상승 뒤에 휘발된 여운. 그래서 <곤지암>은 흉가 체험, 혹은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 이상의 가치를 가지기 어려운 영화처럼 보였다.



곤지암이라는 공간

정범식 감독은 단순히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놀이기구를 만드는 데 만족한 걸까. 물론, 괜찮은 놀이기구를 만드는 것 자체도 엄청난 세공술이 필요한 까다로운 작업이다. (개봉은 했으나 잊히는 공포 영화가 무수히 많다는 걸 생각해보자) 조금의 관점을 바꿔 살펴보면, <곤지암>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현실의 공포와 함께 공명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정범식 감독은 이 ‘곤지암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에 다양한 기호를 새김으로써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담아 뒀다. 그는 <기담> 때부터 영화에 배치한 문자로 메시지를 드러내고는 했다. <곤지암> 개봉 당시에도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 속에 기호를 통해 어떤 사건을 기록하고, 특정 인물을 소환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런 방식으로 정범식 감독은 곤지암이란 괴물이 왜 태어났고, 지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말하려 했다.


가령,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방송을 시청하던 사람들의 숫자가 503명이었다는 점은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와 관련이 있었고, 곤지암 정신병원의 개관일이 5월 16일이었고, 폐관일이 10월 26일이었다는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기와 관련 있다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 곳곳에 숨겨진 문자 및 숫자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찾는 것, 이 기표와 기의의 숨바꼭질이 <곤지암>의 숨겨진 재미이며, 영화를 스크린 밖으로 더 확장하는 열쇠가 된다.


이미 감독의 인터뷰와 이동진 비평가의 성실한 작업을 통해 거의 모든 숨겨진 의미가 드러났기에, 이 글에서는 영화에 흩뿌려진 개별적인 문자와 숫자에 관해서는 더 디테일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예정이다. 이 글에서는 이보다 더 직접적인 이미지와 대사 등을 통해 드러난 영상 기호들을 조합해 <곤지암>의 메시지를 찾으려 했다. 한국의 근현대사 및 정범식 감독의 영화 세계에 꾸준히 숨겨왔던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의 정신과 반항심을 근거해 ‘곤지암’이란 공간을 확장해봤다. 그 맥락 내에서 앞선 기의와 기표의 숨바꼭질은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402호 귀신의 정체

첫 번째로 힌트는 두 명의 대통령이다. <기담>(이 영화엔 은밀히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가 있었다)에 이어 정범식 감독은 <곤지암>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이름을 가져왔는데, 훨씬 더 과감하다. 이름이 적혀있는 현판 등이 영화 중심에 대놓고 등장해, 굳이 애써서 찾으려 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병원 원장의 이미지는 너무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미지와 닮았다. 여기에 “아빠도 대통령이었어?”라는 등의 대사로 두 대통령을 한 번에 언급하기도 했다. 이 두 명의 대통령은 같은 핏줄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지도 못했다. 이런 개인적인 공통점과 함께 더 중요한 건, 두 대통령이 통치하던 시기의 국가 시스템이다. 이들의 시대엔 국가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힌트는 402호 안에 있다. 이 공간은 여러 가지로 기이한 현상들로 가득 차 있다. 입구에서 들려오던 탁구공 소리, 혼자 자리를 바꾸던 인형, 갑자기 튀어나온 귀신, 도망갈 수 없던 밀실 등 봉인되어있던 이 공간엔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너무 많다. 이중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는 천장에 있던 물웅덩인데, 여기서 물이 흘러내렸는지 402호도 물에 조금은 잠겨있었다. 밀실과 물은 앞에 언급한 대통령의 시대와 만날 때, 비극적인 공간과 연결된다.



우선, 1976년에 설립되어 수많은 악행이 있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릴 수 있다. 밀실에서 아무도 모르게 있었던 물고문. 유신 정권 및 군사 독재 정권의 더러움을 안고 있는 이곳은 <1987> 등의 영화로 그 민낯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곤지암>의 후반부엔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기괴한 움직임을 보이던 귀신이 있다. 그리고 벽에 한 줄로 나란히 선 인간들의 형상을 캠코더를 통해 볼 수 있는데, 이는 밀실에서 고문을 당하던 이들과 연결할 수 있다.


세 번째 힌트는 영화 속에서도 언급되는 미스터리다. 오래된 정신병원에 등장하는 여고생 귀신으로, 402호에 들어간 클라이맥스에서 캠코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고괴담의 명장면처럼 캠코더로 비출 때마다 조금씩 다가오는 연출이 인상적인데, 정신 병원이라는 공간과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귀신은 어디서, 왜 나타난 걸까? 앞의 단서들을 조합하면, 거대한 비극이 완성된다. 전 대통령과 물에 잠긴 공간을 여고생과 연결했을 때, 이는 근래에 있던 가장 안타까운 세월호 사건과 연결된다. 정범식 감독의 인터뷰는 이를 더 확실하게 하는데,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처음엔 402호를 416호로 설정하려 했다고 한다. 이 숫자는 세월호 사건이 있던 그날이다.



섞이지 못한 <곤지암>의 메시지

두 명의 대통령과 과거에 희생된 물고문 희생자와 세월호의 희생자를 소환하며, <곤지암>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언급된 희생자들은 국가가 억압했거나, 국가가 지켜주지 못했던 국민을 상징한다. 더 심하게 말하면, 국가가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들이다. 두 대통령 시대의 국가 시스템은 제왕적인 힘을 이용해 국민을 억압하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고, 정범식 감독은 이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한을 ‘곤지암’이라는 공간에 새기고 있었다. 그렇게 ‘곤지암 정신병원’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국민의 한, 그 역사를 보여주고자 한 공간으로 확장된다.


정범식 감독은 곤지암 정신병원 속 공포의 원인이자 출발지를 정권이 만든 폭력에 두고 있다. 그 폭력의 역사가 이 공간에 간섭하며, 영화의 분위기가 더 침울해진다. 글의 시작에서 말했던, 공포심 조성이라는 ‘공포 영화’의 미덕과 근현대사 및 폭력적이고 무능한 시스템을 담은 이미지까지 있는 영화다. 영화적 기교와 의미도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아직, 이 영화를 ‘걸작’이라 부르기엔 망설여진다. 영화에 뿌린 단서들을 찾아 조합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 것이 있다. 앞에서 찾은 문자, 기호, 희생자들의 한이라는 요소를 인물들의 서사와 연결하지 못했다. 발견한 메시지는 ‘곤지암 정신병원’에 숨겨진 의미였지, <곤지암>이라는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끝내 이 영화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특별한 메시지를 담은 ‘곤지암 정신병원’이란 공간은 플롯과 어떻게 이어지고, 이 영화를 하나의 주제로 묶을 수 있는가. 무엇이 <곤지암>을 ‘귀신의 집’ 체험 이상의 것이라 말할 수 있게 하는가. 이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곤지암>의 수많은 기호는 영화와 별개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수수께끼 놀이로, 과잉 혹은 사족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들이 잉여의 것으로 존재할 때엔 문제가 된다.


영화 내의 맥락에서는 독립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은 채 떠도는 환영들. 영화와 섞이지 못한 이 환영들은 정범식 감독의 정치적 성향을 대변하지만, 결국엔 소모되었다. 혹은, 맥락 없는 영화의 결을 풍부하기 위해 정범식 감독은 그 기호를 소모했다. 이 기호들은 <곤지암>을 특별한 의식과 가치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게 ‘영화적인 방법’이며, ‘윤리적인 선택’일까. 역사적 아픔과 희생자들의 사연을 소모하고, 단순히 이스터 에그라는 재미의 요소로 남겨버린 선택엔 찝찝함마저 가지게 한다. 차라리 이런 기호마저도 빼버리고, 완벽한 놀이를 추구했어야 했다. 이 부유하는 기호의 의미와 영화를 묶기 전까진, <곤지암>을 걸작이라 말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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