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2018년 봄, 네 번째 - <버닝>
About Movie.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등을 연출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작가이면서 감독인 그는 묵직한 주제 의식을 담은 영화로 연출작마다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아왔다.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오아시스>), 칸 영화제 각본상(<시>) 등 세계의 주요 영화제에서도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최근 아시안 필름 어워드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2018년 개봉한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며, 칸 영화제 경쟁 부분에 올랐다. 글 쓰는 청년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던 영화로 키노라이츠 지수는 91.3%를 기록 중이다.
작년 5월엔 칸 영화제에서 화제였던 영화, <버닝>의 불길이 국내까지 옮겨 붙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답게 강렬한 감정과 함께, 묵직한 물음을 남긴 이 영화는 난해하다. <버닝>에 다가가는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흙수저 종수가 작가가 되는 성장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려 한다.
벤(스티븐 연)과 종수(유아인)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인다. 벤은 강남에 살며 스포츠카를 물고, 으리으리한 집에서 파스타를 만든다. 종수는 서울밖에 살며 낡은 트럭을 몰고, 오래된 집에서 파리를 쫓으며 요리를 한다. 벤이 별다른 직업도 없이 재미를 갈구하는 한량이라면, 종수는 생계를 위해 아등바등 일하며 즐거움을 포기한 청년이다. 이렇게 <버닝>은 두 남자의 다양한 항목을 차례로 대조하는데, 이를 통해 계층의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를 통해 본 흙수저 종수의 현실은 갑갑하고,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 상황을 반영하듯, <버닝>의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답답하다. 영화는 넓게 펼친 화면을 잘 보여주지 않으며, 종수에게도 넓은 공간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마치, 좁은 공간에 종수를 억지로 구겨 넣은 듯했다.
두 남자뿐만 아니라, 벤과 해미(전종서)의 대비 및 두 사람을 바라보는 종수의 구도도 흥미롭다. 벤은 메타포로 말하는 인간이다. ‘제물을 바친다’, ‘불을 지른다’ 등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비유적인 언어로 드러낸다. 반대로 해미는 마임으로 말하는 ‘듯한’ 인물이다. 그녀는 현실에 없는 걸 있다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한 명은 진짜 의도를 은유 뒤에 가리고, 다른 한 명은 없는 걸 있는 척한다. 종수는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진실을 찾는 데 항상 실패한다.
우선, 종수는 벤의 메타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벤이 말한 ‘불을 지른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종수는 매일 비닐하우스를 점검하며 시간을 낭비했고, 해미를 잃었다. 그리고 종수는 해미의 진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앞서 마임으로 말하는 ‘듯한’이라고 했는데, 이는 종수의 착각을 표현하고자 한 말이다. 해미는 늘 종수에게 진실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지만, 종수는 그걸 몰랐다. 첫 만남부터 해미는 자신이 과거에 못생겼었고, 지금은 성형했다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해미의 집에서 첫 관계를 가질 때, 해미는 그녀의 서랍에서 콘돔을 자연스레 꺼낸다. 언제나 거기 있던 물건을 익숙한 동작으로 찾아내는 그녀의 행동엔 내숭이나 비밀이 없다.
이런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종수는 해미의 말을 믿지 못했다.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던 고양이의 존재와 해미가 어릴 적에 빠졌다는 우물도 의심한다. 그러다 종수는 벤의 집에서 발견되는 고양이와 종수 엄마의 말을 듣고서야, 해미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물론, 아주 늦게서야 알게 된 것이다. 종수의 가장 큰 의심과 실수는 해미가 춤을 출 때 드러난다. 그녀가 삶의 의미를 고민하며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출 때, 종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창녀라는 말을 뱉었다. 함께 고민할 누군가가 필요던 해미에겐 실망스러운 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늘 종수와 고민을 나누고 싶어 했다. 해미가 종수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우물 이야기를 했던 건 종수를 향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종수는 그녀의 진심은 못 보고, 의심부터 했다.
이렇게 보면 종수가 소설을 쓰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종수는 벤이 본질을 감추고, 이를 포장한 비유적 표현은 있는 그대로 믿으면서, 해미의 직설적인 표현은 거짓이라 의심했다. 은유적 표현을 직설로 이해하고, 직설적인 표현은 은유적으로 이해해버린 거다. 의도와 진심을 모두 반대로 이해하는 종수는 글을 쓴다는 사람 치고는 언어의 소통에 늘 실패하고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성숙하지 못한 작가다. 이는 그가 처한 상황 탓이기도 한데, 흙수저인 그는 혹독한 현실 앞에 메타포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누군가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다. 이와 비교해 벤은 메타포 섞인 말을 현란하게 구사하고, 해미의 마음을 가지고 놀 여유가 있었다. 계층의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과 이를 표현하는 언어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버닝>의 또 다른 테마는 대물림이다. <버닝>에서는 부모 세대의 특성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벤의 부모는 제대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아한 가족 모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벤은 젊은 나이에 직장 없이 놀고먹으며 좋은 차를 몰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다. 이와 비교해 종수의 부모는 어릴 적에 이혼했으며, 아버지는 인정 많은 이웃도 좋은 남편도 아니었다. 물론,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다. 어머니 역시, 몇 년 만에 연락된 아들에게 돈을 요구할 뿐 뭔가를 기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덕분에 종수는 가난한 삶을 물려받았고,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한 채 아등바등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둘은 다른 환경 속에 다른 조건을 물려받았다.
이외에도 영화엔 자란 환경의 차이가 가져온 결과를 보여주는 몇 가지 장면이 있다. 공항에서 만난 벤과 해미를 종수의 트럭에 태우고 오는 장면을 보면, 벤은 전화를 하며 자신이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건강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이 장면의 자리 배치는 재미있는데, 마치 종수가 상사를 모시고 운전하는 듯하다. 한 사람은 뒷자리에서 편하게 떠들 수 있는 사람, 한 사람은 앞자리에서 눈치를 보며 그를 모셔야 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걸 보여주고 있다.
종수도 특별한 걸 물려받기는 했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성을 이어받는다. 종수가 아버지 집의 가장 깊숙한 창고에서 발견한 건, 아버지가 숨겨둔 칼이었다. 이 도구는 아버지의 내면에 꼭꼭 숨겨둔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종수의 아버지는 폭행으로 징역을 살 정도로 폭력적이다) 그리고 이런 폭력성은 결국, 이어진다. 영화의 종반부에 종수는 칼로 벤을 찌르며 피를 보고, 불을 지르며 폭발했다.
그래서 흙수저 종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종수의 마지막 선택을 보면, ‘그는 좋은 사람일까’라는 물음엔 쉽게 답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되었을 것 같다. 종수는 마지막에 내면에 꾹꾹 눌러왔던 분노를 꺼냈다. 해미를 그리워했으면서도 정작 그녀가 돌아왔을 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남자는, 이제 감정을 표출해낼 줄 아는 남자로 성장해 있었다. 또한, 종수는 벤이 즐겨 사용했던 메타포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해미와 같이 있다’는 말로 벤을 유인했다. 이는 ‘네가 해미를 죽였다는 걸 알아’라는 걸 돌려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종수는 은유로 장난치던 벤에게, 은유적인 말로 복수를 해낸다.
<버닝>의 마지막 장면은 종수가 작가로 성장했을 거란 믿음을 더 확고히 한다. 그 장면에서 종수는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영화 내내 종수는 글을 쓴다고 했지만, 정작 쓰고 있던 건 아버지의 재판을 위한 공적인 문서였다. 관객은 그가 글을 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말이 아니라 글로 써야 진짜 작가다. 그런 점에서 종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영화에서 퇴장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가 글을 쓰는 공간이 해미의 방이었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는 종수가 그녀의 진심을 이해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렇게 종수는 전에 모르던 걸 알 만큼 성숙한 인간이 되었기에, 근사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면, 관객이 여태 본 게 그의 소설이 아니었을까. <버닝>은 어렵고, 그만큼 읽는 게 즐거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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