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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r 10. 2019

[독전] 믿어야만 살 수 있는 자들의 전쟁

09화. 2018년 여름, 첫 번째 - <독전>


About Movie. <천하장사 마돈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등을 연출한 이해영 감독의 영화. 그는 앞서 연출했던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범죄 스릴러 장르로 520만 관객을 동원했다.  <독전>은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을 리메이크했으며, 어둡고 음침한 누아르의 미장센과 느낌을 잘 살렸다. 범죄자와 형사의 대결인 동시에, 각자 다른 것을 믿는 인간들 간의 대결을 볼 수 있는 영화. 가장 화제가 되었던 건 광기 어린 모습을 보여준 김주혁의 연기였는데, <독전>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키노라이츠 지수는 61.2%로 노란 불을 기록 중이다.



<독전>의 첫 장면은 흰 눈으로 뒤덮인 길에서 시작한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에 멈춰선 차는 연료를 넣고 다시 달린다. 멈추면 죽을 것만 같은 공간이다. 영화는 이 괴괴한 길을 달리는 차를 오래 바라보다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약 범죄를 다룬 누아르 영화의 첫 공간을 순백의 눈이 감싸고 있다는 건 어딘가 반어적이다. 물론, ‘마약’이라는 하얀 가루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순백의 악, 마약을 표현한 이미지로는 너무도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하얀 배경보다 더 인상적인 건 끝없이 펼쳐진 직선의 길이다. 이 길의 끝이 정말 있을지 의심하게 될 정도로 막연한 공간이다. <독전>은 왜 이런 이미지로 영화를 시작한 걸까.


<독전>은 영문 제목 ‘Believer’에서 알 수 있듯 믿음에 관한 영화다. 인물 간의 신념이 부딪히고, 결국 믿음에 홀린 독한 놈들의 독한 전쟁으로 이어진다. 원호(조진웅)는 이 선생을 잡을 수 있다고, 혹은 꼭 잡아야 한다고 믿는 경찰이다. 원호는 그를 잡기 위해 미성년자를 정보원으로 사용하고, 위기의 순간에는 망설임 없이 동료의 머리를 술병으로 칠 수 있으며, 직접 마약까지 흡입하는 인물이다. 독한 놈을 잡으려다 그만큼 독한 놈이 되어버린 원호는 이 선생을 잡아야 한다는 집념을 제외하면, 선과 악을 구별하기 힘든 인물이다. 이 믿음만이 그를 움직이게 하고, 그의 전부로도 보인다. 덕분에 이 집념 외에는 삶의 동력을 찾기 어려웠다.



원호는 이 선생을 잡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비이성적인 행동도 한다. 범죄자인 오연옥(김성령)을 대하는 자세도 그랬고, 처음 보는 락(류준열)을 대할 때에도 경계하지 않는다. 원호는 적일지도 모르는 락의 수갑을 풀어주고, 그의 말만 믿은 채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대범함까지 보인다. 냉정히 말해, 합리적인 인간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선택이다. ‘이 선생을 잡자’라는 제안 앞에서 원호는 믿기 어려운 것을 쉽게 믿고, 그 선택을 확신하는 특이한 인간이다.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브라이언(차승원)도 한 믿음 하는 인물이다. 그는 신학을 전공한 인물로 믿음 그 자체를 아이덴티티로 내세운다. 믿음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믿음을 이용해 사람을 이용한다. 브라이언은 ‘나는 믿어도 된다’, ‘아멘’ 등의 종교적인 언어로 신을 향한 믿음을 보이고, 그 뒤에 숨은 인물이다. 그러다 영화 후반에 가면, 브라이언이 정말로 믿고 있던 게 뭔지 명확히 밝혀진다. 그는 자신을 이 선생이라 믿고, 그를 모방한 뒤, 나중엔 이 선생이 되려 했다. 그의 신은 이 선생이었다. 또 이 선생이다. 브라이언도 원호처럼 믿음이 이 선생을 향하고 있다.


이런 ‘믿는 자’들의 싸움에서 믿음과 가장 동떨어진 인물은 진하림(김주혁)이다. 그가 믿는 건 단 하나,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끝까지 의심하는 인물로, 이 선생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아무도 이 선생이라 믿지 않는다. 이 의심병 때문에, 가장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로도 보인다. 이 믿음이 없는 자가 <독전> 속 남성들 간의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는다는 건 흥미롭다. 마치 영화가 ‘믿음이 없는 자는 죽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역으로 말하면 뭐라도 믿어야 <독전>의 인물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영화 속 인물들의 믿음엔 어떤 합리성이나 근거가 없다. 원호가 왜 이 선생을 잡을 수 있다고 믿고 믿어야 하는지, 브라이언이 왜 자신을 이 선생이라고 믿고 믿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는 러닝 타임 탓에 생략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들이 관심 없었던 부분일 수도 있다. 그들은 그냥 믿는다. (어쩌면 이게 믿음의 본질일 수도 있다) 그리고 <독전>에선 그 믿음이 모두 배반당한다. 그래서 <독전>은 근거 없는 믿음의 허무함과 위험함을 보여주는 영화가 된다.


앞의 관점에서 보자면, ‘락’이라는 인물이 남는다. 그는 무엇을 믿고 있었기에 이 독한 놈들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원하던 결과를 얻고 유유히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그도 특별히 믿는 게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독한 놈들의 전쟁 속에서 믿을 게 없던 진하림처럼 죽어야 했지 않을까. 하지만, 락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믿을 필요가 없는 자다. 그는 이 선생 그 자체였고. <독전>이라는 세상에서 모든 믿음이 향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선 신과 같은 존재로 게임의 진행자였다. 이런 신과 같은 ‘락’이 보여줬던 공허한 표정들은 <독전> 속 인물들이 갈망하고 쫓았던 믿음의 본질이 공허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영화 속 독한 놈들의 믿음은 허무로 향하고 있었다.


이 과잉 믿음 때문일까, <독전>은 인물 내면의 갈등에도 관심이 없다. 기자 간담회에서 조진웅조차 ‘원호가 왜 이 선생에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굵직한 사건을 따라 전개되기에 빠르고 긴장감 넘치는 게 <독전>의 매력이지만, 인물들의 감정선까지 날려버린 건 아쉽다. 인상적인 스타일과 멋진 겉모습을 가졌지만, 인물들의 고민이 없어 이야기의 깊이가 없고, 부실해 속이 빈 영화였다. <독전>은 적인지 아군인지 믿을 수 없는 인물들을 전쟁 속에 던져놓았다. 하지만,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는, 무작정 과한 믿음을 보내는 캐릭터들만이 득실댄다. ‘Believer’라는 영어 제목은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 엄청난 제목이다.



다시 첫 장면을 보자. 원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있다. 목적지를 확신할 수 없고, 중간에 멈추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이다. 원호는 이 길의 끝에 가본 적이 없지만, 일단 앞으로 가야 살 수 있다. 그곳에 멈추면 흰 눈에 묻혀 죽을 것이다. 그래서 달린다. 여기서 달리는 그의 모습은 불확실성 속에서, 무작정 이 선생을 따라가는 그의 모습과 닮았다. 원호는 이 선생을 본 적이 없지만, 일단 그의 정체를 믿어야 살 수 있다. 이 삶의 의미조차 없다면, 살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믿었다.


그 길의 끝에서 원호는 그토록 찾던 이 선생을 만난다. 이제 원호는 이 선생을 쫓지 않아도 된다. 더는 이 선생을 잡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토록 찾던 걸 본 원호의 눈빛도 공허했다. ‘이 선생’의 눈빛이 전염된 듯 말이다. ‘이제 뭘 할 거냐’는 이 선생의 말에도 원호는 아무런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는 믿을 걸 잃었고, 덕분에 더 갈 곳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마지막에 들린 총성은 원호를 향한 것으로 봐도 될 것 같다. 그는 믿을 것이 없기에, 삶을 지속할 이유도 없어졌다. 그래서 그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것만 같다.


P.S 확장판을 통해 총성이 향한 곳은 원호가 아닌, 이 선생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인물들의 고민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마지막 총성이 누구를 향했든 영화에 새로운 의미를 주지는 못하는 영화다. 그래도 원호의 죽음을 믿으며 글을 썼기에, 확장판의 공개 이후 허무함이 찾아왔다. 마치 이 선생의 표정이 전염된 듯 말이다. 믿음의 끝이 비어있다는 걸 이렇게 끝까지 말하는 영화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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