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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Feb 03. 2019

[셰이프 오브 워터] 물속에서 찾은 자유

04화. 2018년 겨울, 네 번째 - <셰이프 오브 워터>

About Movie. <헬보이>, <퍼시픽 림>,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등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보여준 기예르모 델 토로의 동화 같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우주 개발 경쟁으로 분주했던 1960년대 미 항공우주 연구 센터에서, 말하지 못하는 여성과 괴생물체의 만남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폭력적인 세계에 맞선 소수자들 간의 소통과 사랑을 담았고, 영화관을 비롯해 당대의 다양한 영화를 보여주는 등 ‘길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모습에 아카데미 협회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 미술상, 음악상, 감독상, 작품상을 안겼다. 키노라이츠 지수는 98.7%를 기록 중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시즌이 다가왔고, 매체에서는 노미네이트 된 영화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를 제외하고, 국내에서 가장 뜨거운 건 <블랙 팬서>, <보헤미안 랩소디> 정도가 있는 듯하다. <블랙 팬서>는 정치 사회적 올바름에 관해 말하고, 흑인 히어로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과연 아카데미에서 불러올 작품인가에 관한 의문이 따라오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도 초대받지 못한 자리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향한 비판의 시선도 있다.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사랑한 대중의 호평을 끌어냈고, 한국에서는 차트 역주행으로 992만이라는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대중이 자발적으로 관람 문화를 만들었고, 유사 콘서트 같은 싱어롱 상영관의 흥행은 영화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신화도 영화의 완성도에 관한 의문을 지우지는 못한다. 대중의 사랑과 달리, <보헤미안 랩소디>의 전개와 편집 등은 걸작이라 부르기엔 아쉬운 점이 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중간에 하차했다는 제작상의 문제부터 이런 공백은 예정된 것이었다. 퀸의 음악, 그리고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 졌던 빚이 너무도 많은 영화라고나 할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런 논란이 없던 영화다. 후보에 오른 이후부터 유력한 수상 후보였고, 결국엔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은 황홀했고, 이 영화가 보여준 1960년대의 미장센은 당시의 역사성을 반영하면서도 동화 같은 상상력이 더해져 아늑했으며,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를 디자인한 길예르모 델 토로는 냉전 속에서도 따뜻한 사랑을 꽃피워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영화 그 자체에 존경을 보내는 작품을 반겨왔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영화에 대한 사랑과 존경 속에 헤엄치고 있었고, 결국 영화의 가능성에 관해 말하고 있었기에 외면할 수 없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소수자의 연대와 신의 재림

<셰이프 오브 워터>의 구도는 뚜렷하다. 냉전 시대 미국의 주류 문화에 있던 인물들과 그 주류에 속할 수 없던 소수자들 사이의 대립이 명확히 보인다.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보통의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없는 언어 장애가 있다. 주류에 있던 이들은 그녀와 소통이 불가능하거나, 시도하지 않는다. 젤다(옥타비아 스펜스)는 흑인이었고, 덕분에 백인에게 무시당한다. 리차드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가 신은 흑인인 젤다보다 백인인 자신의 모습과 닮았을 거라고 말하는 대사나, 자일스(리차드 젠킨스)가 자주 갔던 파이 가게에서 흑인을 위한 자리가 없는 장면을 통해 당대의 차별적인 시선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엘라이자와 젤다는 여성이었고,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화장실에서 남성의 배설물을 닦거나 참혹한 고문이 남긴 피를 지우는 것뿐이었다. 다른 시선에서 보자면,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이 두 소수자는 미국 항공우주 연구센터의 권력자들과 대립하며, 그들이 남긴 더러운 것(배설물과 피)을 깨끗이 정화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자일스 역시 주류 문화에 속하지 못한다. 그는 사진의 시대에 그림을 그리며 뒤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그의 작품은 기업의 컨셉과 맞지 않았고, 약자였던 그는 의도와 다른 작품을 만들지만 그마저도 외면당한다. 거기에다 동성에게 끌리는 성 정체성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맛이 없던 파이 가게의 단골이 될 만큼 그는 파이 가게의 종업원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었다. 종업원이 자신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즐거워했으며, 맛없는 파이를 버리지 않고 전리품처럼 냉장고에 전시해둘 만큼 특별했던 마음이다. 그런데 그 종업원의 관심이 돈을 벌기 위한 판매 전략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진심을 알게 된 자일스는 파이를 뱉어버린다. 여기서 이 파이 가게는 자본주의와 함께 태어난 ‘체인점’이라는 경제 권력의 하수인이었고, 자일스는 자본주의의 미소에 속았던 순진한 인간이었다. 그는 예술가이자 한 남자로서 모두, 시대의 주류들에게서 배신당했다.



이렇게 외면받고 상처 받은 약자들이 그들과 전혀 무관한 괴물을 구하는 여정에 뛰어든다. 물속에서는 강력하지만, 물 밖에서는 살 수 없던 이 괴물은, 60년대의 미국이란 권력 앞에서는 해부되어야 할 실험 대상이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의도치 않게 가장 약하고 외로운 존재가 된 괴물을 소수자들이 힘을 모아 해방시킨다. 소수자들이 더 소외당한 존재를 향해 손을 내민다는 점에서 따뜻한 이야기다.


혹은, <셰이프 오브 워터>는 약자들이 최약자였던 이를 가장 높은 ‘신’의 자리에 앉히는 서사이기도 하다. 스트릭랜드는 마지막에 “넌 신이었군”이라는 말을 하고 처벌을 받는다. 이후 이 괴생명체는 물로 돌아가면서 자유를 찾고, 엘라이자를 부활시키며 ‘신’의 권능을 보여준다. 영화에 무수히 자주 등장했던 달걀마저도 이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자일스에겐 젊음(머리숱)을 찾아주면서 권선징악형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단,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의 탈출을 도왔던 젤다와 호프스테들러 박사(마이클 스털버그)는 왜 구원을 받지 못했을까. <셰이프 오브 워터>는 성경에 관한 언급이 다수 있다. 성모 마리아의 고아원에서 자란 ‘엘라이자’, 그리고 젤다는 자신의 이름에 D가 있는데, 이는 삼손을 배반한 ‘딜라일라’의 약자였다. 이름이 복선이 되었던 걸까. 엘라이자는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받았다. 더 과하게 풀어보자면, 그는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뒀고, 그래서 죽음 뒤에 부활할 수 있었다.


다시, 젤다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딜라일라가 삼손을 배반하듯, 젤다의 남편은 엘라이자의 행방을 스트릭랜드에게 알린다. 그런 이유로 그녀에게 약속된 구원과 보상은 있을 수 없었다. 호프스테들러 박사의 경우엔 스파이 생활 중이었다.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것이다. 영화엔 젤다가 신의 물음에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여기서 추측하자면 호프스테들러는 신 앞에서 거짓말을 했고, 그래서 구원받을 수가 없었다.



물과 영화에서 찾은 자유

<셰이프 오브 워터>의 억압받는 세상에서 주인공들에게 쾌락과 자유를 허락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물이라는 공간이다. 엘라이자는 물속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부터 욕조에서 자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물이 주는 자유의 해방감과 쾌락의 황홀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물에 갇힌 괴생명체와 만나 교감하고 위안을 얻으며, 나중엔 그와 함께 물이 가득 찬 욕실에서 관계를 가지며 변한다. 자일스가 18살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최대한 섹스를 많이 해”였듯 <셰이프 오브 워터>는 육체적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엘라이자도 관계 이후 빨간색의 옷을 입고, 구두를 신으며 해방된 자신을 드러낸다.


물의 해방감이 절정에 달하는 건 마지막 씬이다. 괴생명체는 죽은 엘라이자를 부활시키고, 그녀에겐 아가미가 생긴다. 그녀는 영원히 물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엘라이자에게 물은 특별한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그녀는 다른 모든 존재와 동등한 입장이 되기에 소수자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그녀가 늘 물에서 쾌락을 구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엘라이자는 이 자유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출생이 강가였다는 점, 그리고 목의 상처가 아가미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물속에 사는 괴생명체가 신이었듯 엘라이자도 신의 공간에서 출생한 셈인데, 앞에 언급한 성경과 관련된 부분과도 잘 어울리는 지점이다.



물 이외에 영화가 자유와 쾌락에 관해 말하는 건 ‘영화’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영화관 위에 사는 엘라이자, 영화를 응시하는 괴생명체, 그리고 TV 속 영화를 응시하는 자일스와 엘라이자 등을 관객의 자리에 앉힌다. 소수자인 그들이 영화에 매혹되어 있었다. 엘라이자는 영화의 탭댄스를 따라 하며 현실을 영화화하고, 자일스는 목숨을 건 탈주를 영화화한다. 영화는 이들에게 현실 이상을 보게 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믿게 했다. 그리고 결핍된 것을 채워주기도 한다. 괴생명체와 이별을 앞둔 엘라이자는 식사 도중, 뮤지컬 배우처럼 노래한다. 말을 할 수 없던 그녀가 목소리를 내고, 가상의 무대에서 괴생명체와 춤을 추며 소망을 드러낸다.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했던 엘라이자와 자일스가 영화에 매혹된 인간들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셰이프 오브 워터>는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봐도 좋을 것 같다. 60년대의 우주 개척에 미쳐있는 인간들보다 먼저 달에 갔던 것이 영화 <달세계 여행>이었듯,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영화적 상상력 앞에서는 힘이 없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영화를 본 인간, 그리고 현실에 영화를 끌어올 줄 아는 인간, 끝으로 현실을 영화로 만든 인간들이 승리하는 서사의 있는 영화였다. 이렇게 미국이 중시하는 성경과 함께, ‘영화’ 그 자체의 힘을 믿고 사랑하는 <셰이프 오브 워터> 앞에서 미국 아카데미 협회는 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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