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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Apr 21. 2019

그 ‘디폴트’는 우리의 ‘폴트’가 아니다

15화. 2018년 가을, 세 번째 <국가부도의 날>

2018년엔 ‘빚투’가 화제였다. 빚과 관련된 이 기이한 용어로 온라인은 뜨거웠고, 대중은 갚지 못한 돈이 남긴 흔적들을 봤다. 1997년에도 빚 때문에 큰일(IMF)이 있었다. IMF로 급격한 실업률과 자살률의 증가 등 악몽에 시달렸고, 학교에선 금 모으기, 아나바다 운동이 한창이었다. 국가의 빚이 우리의 빚이고, 우리의 책임이라 믿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게 아니라 말한다.


그 시절을 소환하는 <국가부도의 날>은 재미없는 영화다. 그때를 통과하고, 국가와 인생의 큰 변곡점을 목격했던 세대에겐 재미있을 수가 없다. 제대로 마주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영화는 빚으로 쌓은 제국의 몰락을 다양한 측면에서 비춘다. 단, 세 명의 인물로 국가 부도의 큰 그림을 이해하게 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의 교집합을 통해, 그 시절에 국민이 가져야 했던 죄책감까지 덜어준다. 그 교집합은 급격한 성장을 이뤄냈다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신화’다.




거짓된 신화 속대한민국의 민낯

한시현(김혜수)은 한국은행에서 일하며, 국가부도의 상황을 예측한다. 그녀는 점쟁이가 아니다. 통계와 수치, 세계 동향을 분석한 객관적 증거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국가부도의 날>은 전문가라면, 그 당시 드러난 징후를 종합해 국가 부도의 순간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든, 영화보다 이른 시점에 누군가는 이미 이 재앙을 보고받았을 것이란 합리적 추론도 가능하다.


<국가부도의 날>엔 국가 부도를 미리 알고 있던 정부와 최상위 계층이 있다. 이들은 이 위험한 정보를 국민에게 알려주지 않는 배려를 보인다. 대기업이 진 빚을 국민이 떠안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빚을 떠안게 될 당사자들이 아닌, 떠넘길 자들끼리 책상에 앉아 국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런 기득권의 품격 있는 모습을 통해, <국가부도의 날>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그리고 ‘성공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신화를 깬다.




“김대중 대통령은 옥중서신에서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참여의 정치’라고 했다. 참여의 정치란 백성이 주인 되는 정치, 백성이 자신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정치, 백성이 스스로 신이 나서 건설하고 나라를 지키는 정치, 백성이 그 속에서 발전하는 정치라며 그 비전을 이렇게 보여줬다.”


강원국 작가의 『대통령의 글쓰기』(176p 중)에서 가져온 글이다. 인용문에 따르면, 1997년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1997년 대한민국은 백성이 배제된 정치를 하며,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리고 그 거짓의 결과가 IMF로 이어진 셈이다. (<국가부도의 날>엔 차기 대통령 후보가 IMF에 각서를 썼다는 내용이 있다. 그 덕에 저 인용문이 전보다 더 흥미롭다.)



신화를 거부한 채, 전설이 된 남자

윤정학(유아인)은 대한민국의 신화에 속지 않고, 이를 이용하는 인물이다. 언론과 정부의 보도를 믿지 않고, 위기를 인생을 바꿀 기회로 여긴다. 냉철하고 영리한 인물이다. 하지만, 좋은 인물이라 말하기엔 망설여진다. 그는 역사 속, 난세의 영웅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일어선다. 난세의 영웅이 백성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면, 그는 국민을 죽이는 길 위에서 힘을 얻는다.


윤정학은 기득권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인물로, 이 욕망이 뚜렷하게 표출되는 두개의 장면이 있다. 하나는 아수라장이 된 옛 직장에서 볼 수 있다. 회사가 망해 좌절한 옛 동료들과 돈을 잃어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던 윤정학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들에게 연민을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야심을 더 선명히 드러낸다. 윤정학은 그가 출발한 곳으로 돌아와 자신이 예전과 다른 위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돈이 많다는 이유로 존대했던 오렌지(류덕환)을 때림으로써, 이전과 달라진 자신의 권력을 확인한다. 힘을 얻은 야수의 서열정리다.


새로 이주한 집에서 윤정학이 시체를 목격하는 장면에선 더 광기 어린 욕망을 볼 수 있다. 시체를 보고 나가려는 오렌지와 달리, 윤정학은 자신의 집이기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타인의 파산을 발판으로 ‘좋은 집’에 입성한 남자가, 이젠 누군가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올라서려는 장면이다. 여기서 새로운 집은 윤정학이 점령한 영토다. 그리고 그의 변화상은 대한민국 기득권이라는 육식동물의 성장기가 된다.



신화를 믿은 순수한 남자

갑수(허준호)는 국가의 부도로 인생이 망가진 소시민이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국가의 신화를 믿은 순진함에 있다. 그는 권위 있던 정부와 언론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고, 덕분에 나중에 모두에게 배신당한다. 그 배신 속에서도 실체 없는 국가의 빚을 함께 짊어지는 미련한 시민이다. 또, 갑수는 너무 착하다. 착한 인간이라 이웃을 무한히 신뢰했지만, 그 신뢰는 낙뢰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순진한 갑수는 그 시대를 통과한 아버지, 가장의 얼굴을 대표한다. 그는 가족 앞에서 국가 대신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 시기에 위기를 겪었던 관객에겐 기시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갑수는 그 시절의 기억과 공명해 슬픔, 혹은 분노의 기억을 끌어낸다. 그 덕에, 가장 수동적임에도 영화의 감정선을 담당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유일하게 성격이 변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국가부도의 날>은 20년 이후의 세상을 보여주며, 변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갑수는 달랐다. 신화를 믿었던 남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가 되어있다. 영화의 마지막엔 ‘불신’을 원칙으로 삼는 가장이 서 있다.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외국인 노동자에 소리치는 한 컷에 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갑수는 생산성을 위해 직원에게 막말을 날리는 비정한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공장의 직원이 모두 비정규직으로 바뀌었음을 추측해볼 수도 있다. IMF라는 사건, 그리고 기업이 떠넘긴 빚은 새로운 시스템과 인정 없는 세상을 낳았다.



마지막 시퀀스로 확장되는 영화

과거를 재현한 <국가부도의 날>은 마지막 시퀀스, 그러니까 현재를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메시지가 확장된다. 영화는 IMF를 겪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것, 여전히 그 위험에 배팅해 돈을 버는 기득권이 있다는 걸 마지막 장면을 통해 힘주어 말한다. 20년이 지나도 세상이 변하지 않았음을 IMF가 현재 진행형임을 경고한다. 또 다른 신화를 말하는 국가와 언론 앞에서, 늘 깨어 있으라 한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모인 돈이 기업의 부채를 갚는 데 쓰였다는 마지막 자막은 어떤 후련함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동시에, 이는 IMF를 통과한 세대에게 명확히 알려준다. 그 당시 국가의 디폴트(파산)가 그대들의 폴트(잘못)가 아니었음을. 빚을 진자와 갚아야할 자가 따로 있었음을.


글을 마무리하며, 빚을 잊은 누군가의 이름을 외쳐본다. “수많은 가정을 파탄 내고, 엄청난 빚을 떠넘긴 자들을 고발한다. 국가라는 이름 뒤에 숨었던 기득권을 고발한다. 대한민국의 거짓된 신화 뒤에서 영광을 누렸던 많은 이를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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