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등반에 동참할 것인가
산악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등산을 바탕으로 한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은 <클리프 행어>가 있습니다. 꽤 오래전에 봤음에도 ‘재미있었다’라는 느낌과 <록키>의 주인공 ‘실베스터 스탤론’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네요. 산의 꼭대기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나 봅니다. 이번 주에 읽어볼 영화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에베레스트>입니다.
영화 <에베레스트>와 같은 사건을 다룬 존 크라카우어의 책, 『희박한 공기 속으로』엔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는 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다. 현명한 분별에 대한 욕구의 승리.” 직접 정상에 올라본 그가 한 말이기에 자기반성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구절이죠. 비합리적인 행위. 등산에 관심이 없는 관객은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공감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들의 등반은 이성적인 선택이 아니죠. 그렇다면 <에베레스트>는 관객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요. 무모한 그들의 도전에 공감하고 동참하게 할까요, 아니면 비합리적인 행위에 눈먼 인간의 모습을 관찰하게 할까요.
에베레스트의 정상은 지구의 지붕, 그중에서도 꼭대기라는 점이 매력입니다. 이 강렬한 매력은 목숨을 담보로 합니다. 그래서 이곳을 등반한다는 것은 인간, 혹은 인류의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이 ‘무엇’은 산을 오르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도전 의지, 탐험 정신, 정복 욕구 등의 이유를 댈 수도 있고, 누군가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오른 조지 멜로리는 그가 산을 오른 이유에 대해 “그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고 하죠. <에베레스트> 속의 등반대원들도 저마다의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등반을 합니다.
특히 두 사람이 기억에 남습니다. 일본인 여성 야스코 남바는 이미 6대륙의 최고봉에 올랐고, 에베레스트가 마지막 남은 대륙의 지붕이었기에 이번 등반에 참여했습니다. 왜 산을 오르느냐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구할 수는 없지만, 그녀에게 등산은 인생이었고, 에베레스트는 그녀의 마지막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더그 한센이 있습니다. 이미 두 차례 도전에 실패한 그는 자신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사람이었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등반이라고나 할까요. 이 영화에서 그가 가장 명확하고, 공감할만한 극적인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에베레스트는>는 롭 홀(제이슨 클락)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영화는 등반대원들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취하며, 인물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죠. 인물 각자에게 몰입하는 과정이 친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등반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관객이 이들의 등반을 ‘비합리적인 행위’, 무모한 도전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는 것이죠. 가족을 두고 목숨을 자발적으로 거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1996년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시점 선택은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극영화로서의 몰입·공감 부분에서 한계를 가질 수 있죠. 관객이 몰입에 성공한다면 무한도전으로, 끝내 몰입하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면 무모한 도전으로 인물들을 바라볼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험정신,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나려는 의지를 보는 긍정적인 관객도 있겠지만 이와는 대척점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에베레스트를 도전이 상업적 상품과 연관되어 있다면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롭 홀의 어드벤쳐 컨설턴트는 등반 사업입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등산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산악인들은 에베레스트가 상업주의로 오염되고 더럽혀졌다는 걸 눈치챘다.”, “내 동료 고객들과 나는 아담한 소도시 출신의 소프트볼 선수들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뇌물을 써서 단번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엉터리들의 집합인 셈이었다.”
<에베레스트>엔 산을 정복의 대상이자, 개인의 명예를 위한 것, 상업주의 속의 경쟁대상처럼 여기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본다면 <에베레스트>의 자연재해는 인간의 얼룩진 도전정신에 대한 대가로 읽힐 수도 있겠죠. 그들의 욕심이 1996년의 재난을 불렀다고 보는 관객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등산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인물에 대한 몰입에 따라 <에베레스트>는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영화입니다. 저처럼 인물에 몰입할 여유가 없던 관객은 극영화로서 재미가 느슨해 아쉬울 수도 있지만, 관찰자적 시점에서 다양한 인물들에게 직접 다가가며 영화를 즐기는(영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관객은 이를 더 반길 것입니다. 벡 웨더스(죠수 브롤린) 같은 인물은 등반의 목적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생존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감동을 주죠. 그리고 이 영화는 눈이 즐거운 영화입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분에게는 ‘아이맥스’ 관람을 추천합니다. 크레바스를 이어주는 위태로운 사다리를 통과할 때, 아슬아슬한 절벽을 볼 때, 그리고 산의 절경을 감상할 때엔 최대한 큰 화면을 권하고 싶네요. 거대한 스크린에서 광활한 에베레스트를 보며, 등반을 체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