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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기#004 인턴

<인턴>이라는 판타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사회 초년생의 어려움을 보여줬던 앤 해서웨이가 30대 CEO로 돌아왔습니다. 프라다를 걸치며 환골탈태하던 그녀에게 더 이상 그 비싸고 멋진 옷들은 없죠. 이제 홀로 당당히 빛나고 있는 최고 경영자가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녀의 곁엔 로버트 드 니로라는 근사한 보조가 있습니다. 물론, <대부>, <택시 드라이버> 때의 그 남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인턴>을 관람하셨다면, 이 70대의 노인을 고용하고 싶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올 추석 시즌에 개봉한 영화 <인턴>. 함께 개봉한 <사도>, <탐정> 등에 비해 홍보가 덜 되었고, 근래 극장에서 성공했던 영화들에 비해서는 자극이 덜한, 소소한 이야기로 어필을 할 요소가 적은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세 편을 다 보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다른 걸 떠나서 모두가 편하고 즐겁게 볼 수 있는, 따뜻한 영화는 <인턴>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판타지물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준비한 글은 이 영화가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이유에 대한 글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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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로버트 드 니로’

로버트 드 니로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많은 영화에서 마초적인 남자를 연기했었습니다. 그 외에도 <대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의 영화에서도 강렬하고 거친 상남자의 전형을 보여줬었죠. 그랬던 그가 <인턴>에서는 인자하고 푸근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함께 연기했던 앤 해서웨이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던 로버트 드 니로의 새로운 모습. 노년의 배우가 준비한 연기변신을 보는 것은 환상적인 일이라 할 만합니다.


로버트 드 니로 덕분에 벤 휘태커라는 캐릭터는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캐릭터가 됩니다. 은퇴 후의 시간을 버려두고 흘려보내는 인간이 아닌, 새로운 열정으로 노년의 시간을 채워 넣어야만 할 것 같죠. 그는 코난처럼 주변에서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할아버지이고, 시간을 그냥 보내버리기엔 데이트 신청이 끊이지 않을, 여전히 매력이 넘치는 할아버지입니다. 낸시 마이어스 감독이 노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년 주인공의 매력·에너지가 필요했다면, 로버트 드 니로의 캐스팅과 연기변신은 무척 좋은 선택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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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은 인생을 정리하는 노인의 나레이션으로 문을 엽니다. 꽤 많은 영화에선 노인의 나레이션 뒤에 플래시 백을 사용하죠. 그리고 그 인물을 과거의 사건을 들려주는 도구로 이용합니다. 하지만 <인턴> 속 로버트 드 니로의 나레이션은 회고담이 아닌, 도전을 위한 면접 중 일부였습니다. 이 영화는 노년에게 과거만을 붙잡고 있는 이야기꾼이 아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주인공의 위치를 배정해줍니다. ‘일하고 사랑해라. 사랑하고 일하라’ 그의 주름진 피부 안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세상과 소통하려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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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청년의 공존

‘달관 세대’와 ‘반퇴 푸어’가 공존하는 현 대한민국은 젊은 세대이든 노년 세대이든 모두 힘들고, 저마다의 고민이 있습니다. 취업과 실업, 은퇴와 노후생활에 대한 다양한 문제가 동시에 터져 나오는 와중에 세대 갈등도 점점 커지고 있다는 소식들도 전해지죠. 이 시점에 <인턴>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세대 간의 소통은 닿을 수 없는 판타지처럼 느껴졌습니다.


<인턴>에서 벤은 인터넷과 컴퓨터로 운영되는 세상에 낯설어합니다. 인턴이 되기 위해 동영상을 보내는 것부터가 거대한 도전이라고 하죠. 입사 후엔 노트북 컴퓨터를 켜지 못해 난감해 합니다. 그 어떤 복장보다 양복이 더 편하고, 여전히 오래된 서류가방 속의 아날로그 물건들에 애착을 느낍니다. 그의 아침을 깨우는 것도 아날로그식 시계의 알람이었죠. 하지만 <인턴>은 그를 과거에 붙잡힌 망령으로 두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활방식에 적응하고, 젊은이들과 소통하며 그들과 일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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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은 과거 수직적 조직구조를 경험했고, 부사장의 위치까지 올라갔었습니다. 임원까지 경험한 사람이 인턴부터 다시 시작하며, 과거의 습관을 버리며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은 쉽게 생각하기 힘들죠. 그래서 이 부분이 현실에는 결코 없을 상황이자,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벤이 인턴으로 있는 회사는 과거 그가 과거 수십 년 동안 일한 회사였죠. 그가 과거 자신이 일하던 곳을 가리키며 줄스(앤 해서웨이)와 이야기 하는 장면은 서글픔과 그리움, 감동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옵니다. 이젠 사용하지 않는 전화번호부처럼 설 자리가 없어진 노년의 쓸쓸한 고백이자, 부사장이라는 영광에 연연하지 않고 여전히 이 시대 속에서 숨 쉬고 싶은 인간의 의지를 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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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젊은 세대의 모습도 독특합니다. 신기술에 뒤처진 노인을 짐으로 생각하거나 어려워하며 꺼릴 것 같았지만, <인턴> 속의 젊은이들은 달랐습니다. 우선은 벤이 일에 적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벤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며, 때로는 함께 문제를 해결하며 친구가 되었죠. 영화 중간에 케이퍼 무비처럼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에피소드는 그들의 관계를 재미있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고민을 공유하고, 함께 일을 벌이고, 비밀을 간직하는 사이. 영화 속 청년들은 벤의 경험에 기대고, 벤은 그들을 위해 늘 ‘손수건’을 준비하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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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워킹맘과 집안일 하는 남자가 보여주는 부부의 이야기도 우리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판타지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남녀에 대한 시선을 경쟁 영화인 <탐정>이 보여주는 시선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글을 마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인턴이라는 소재를 한국에서 영화화했다면 어떤 작품이 탄생했을까. 최근 개봉한 <오피스>처럼 비정한 취업시장, 갑과 을의 문화가 중심이 된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을까요? 인턴을 소재로 이렇게 따뜻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판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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