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이라는 판타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사회 초년생의 어려움을 보여줬던 앤 해서웨이가 30대 CEO로 돌아왔습니다. 프라다를 걸치며 환골탈태하던 그녀에게 더 이상 그 비싸고 멋진 옷들은 없죠. 이제 홀로 당당히 빛나고 있는 최고 경영자가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녀의 곁엔 로버트 드 니로라는 근사한 보조가 있습니다. 물론, <대부>, <택시 드라이버> 때의 그 남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인턴>을 관람하셨다면, 이 70대의 노인을 고용하고 싶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올 추석 시즌에 개봉한 영화 <인턴>. 함께 개봉한 <사도>, <탐정> 등에 비해 홍보가 덜 되었고, 근래 극장에서 성공했던 영화들에 비해서는 자극이 덜한, 소소한 이야기로 어필을 할 요소가 적은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세 편을 다 보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다른 걸 떠나서 모두가 편하고 즐겁게 볼 수 있는, 따뜻한 영화는 <인턴>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판타지물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준비한 글은 이 영화가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이유에 대한 글이 될 것 같네요.
로버트 드 니로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많은 영화에서 마초적인 남자를 연기했었습니다. 그 외에도 <대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의 영화에서도 강렬하고 거친 상남자의 전형을 보여줬었죠. 그랬던 그가 <인턴>에서는 인자하고 푸근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함께 연기했던 앤 해서웨이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던 로버트 드 니로의 새로운 모습. 노년의 배우가 준비한 연기변신을 보는 것은 환상적인 일이라 할 만합니다.
로버트 드 니로 덕분에 벤 휘태커라는 캐릭터는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캐릭터가 됩니다. 은퇴 후의 시간을 버려두고 흘려보내는 인간이 아닌, 새로운 열정으로 노년의 시간을 채워 넣어야만 할 것 같죠. 그는 코난처럼 주변에서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할아버지이고, 시간을 그냥 보내버리기엔 데이트 신청이 끊이지 않을, 여전히 매력이 넘치는 할아버지입니다. 낸시 마이어스 감독이 노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년 주인공의 매력·에너지가 필요했다면, 로버트 드 니로의 캐스팅과 연기변신은 무척 좋은 선택지 같았습니다.
<인턴>은 인생을 정리하는 노인의 나레이션으로 문을 엽니다. 꽤 많은 영화에선 노인의 나레이션 뒤에 플래시 백을 사용하죠. 그리고 그 인물을 과거의 사건을 들려주는 도구로 이용합니다. 하지만 <인턴> 속 로버트 드 니로의 나레이션은 회고담이 아닌, 도전을 위한 면접 중 일부였습니다. 이 영화는 노년에게 과거만을 붙잡고 있는 이야기꾼이 아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주인공의 위치를 배정해줍니다. ‘일하고 사랑해라. 사랑하고 일하라’ 그의 주름진 피부 안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세상과 소통하려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달관 세대’와 ‘반퇴 푸어’가 공존하는 현 대한민국은 젊은 세대이든 노년 세대이든 모두 힘들고, 저마다의 고민이 있습니다. 취업과 실업, 은퇴와 노후생활에 대한 다양한 문제가 동시에 터져 나오는 와중에 세대 갈등도 점점 커지고 있다는 소식들도 전해지죠. 이 시점에 <인턴>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세대 간의 소통은 닿을 수 없는 판타지처럼 느껴졌습니다.
<인턴>에서 벤은 인터넷과 컴퓨터로 운영되는 세상에 낯설어합니다. 인턴이 되기 위해 동영상을 보내는 것부터가 거대한 도전이라고 하죠. 입사 후엔 노트북 컴퓨터를 켜지 못해 난감해 합니다. 그 어떤 복장보다 양복이 더 편하고, 여전히 오래된 서류가방 속의 아날로그 물건들에 애착을 느낍니다. 그의 아침을 깨우는 것도 아날로그식 시계의 알람이었죠. 하지만 <인턴>은 그를 과거에 붙잡힌 망령으로 두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활방식에 적응하고, 젊은이들과 소통하며 그들과 일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벤은 과거 수직적 조직구조를 경험했고, 부사장의 위치까지 올라갔었습니다. 임원까지 경험한 사람이 인턴부터 다시 시작하며, 과거의 습관을 버리며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은 쉽게 생각하기 힘들죠. 그래서 이 부분이 현실에는 결코 없을 상황이자,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벤이 인턴으로 있는 회사는 과거 그가 과거 수십 년 동안 일한 회사였죠. 그가 과거 자신이 일하던 곳을 가리키며 줄스(앤 해서웨이)와 이야기 하는 장면은 서글픔과 그리움, 감동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옵니다. 이젠 사용하지 않는 전화번호부처럼 설 자리가 없어진 노년의 쓸쓸한 고백이자, 부사장이라는 영광에 연연하지 않고 여전히 이 시대 속에서 숨 쉬고 싶은 인간의 의지를 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나 할까요.
영화 속 젊은 세대의 모습도 독특합니다. 신기술에 뒤처진 노인을 짐으로 생각하거나 어려워하며 꺼릴 것 같았지만, <인턴> 속의 젊은이들은 달랐습니다. 우선은 벤이 일에 적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벤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며, 때로는 함께 문제를 해결하며 친구가 되었죠. 영화 중간에 케이퍼 무비처럼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에피소드는 그들의 관계를 재미있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고민을 공유하고, 함께 일을 벌이고, 비밀을 간직하는 사이. 영화 속 청년들은 벤의 경험에 기대고, 벤은 그들을 위해 늘 ‘손수건’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 외에도 워킹맘과 집안일 하는 남자가 보여주는 부부의 이야기도 우리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판타지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남녀에 대한 시선을 경쟁 영화인 <탐정>이 보여주는 시선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글을 마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인턴이라는 소재를 한국에서 영화화했다면 어떤 작품이 탄생했을까. 최근 개봉한 <오피스>처럼 비정한 취업시장, 갑과 을의 문화가 중심이 된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을까요? 인턴을 소재로 이렇게 따뜻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판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