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094 괴물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 중 '중립 기어'라는 게 있다. 이 단어엔 차량 등의 기어를 중립에 둔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으며, 웹상에서는 한 사건에 관해 정보가 충분할 때까지 판단을 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 서겠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섣부른 판단과 최초 보도가 가져올 선입견을 경계하기 위한 행동일 거다. <괴물>은 그 판단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하나의 사건은 한 개인의 이기적인 심리와 방어기제가 작동한 언어로 재구성되어 전달된다. 인간이 기억하거나 재구성한 사건은 주관적이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이에 관해 말했던 영화다. 그리고 이야기를 전달받는 이도 인간이기에 역시 심리적 요인이 작동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수용한다. 이런 걸 생각하면 애초에 인간 사이의 소통에 있어 진실이라는 게 제대로 전달될 수는 있는지, 그리고 진실이란 게 있을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괴물>은 소년들이 학교에서 겪은 일을 세 번 반복해서 보여준다. 하나의 타임라인이 세 가지 시선을 통해 반복되고, 이 시선에 따라 사건의 의미와 극의 정서가 다르게 다가온다. 세 번의 반복으로 보강된 서사를 보며 다양한 인과관계를 찾으려 노력할 수 있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도 명확한 인과관계를 규정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남아 있다. 무려 세 번을 반복해서 봤음에도 말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번 봐도 삶에는 명확하게 떨어지지 않는 일이 참 많다. 하나의 행위에 영향을 준 다양한 원인을 추측할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을 초월하는 인간의 심리는 훨씬 더 복잡하다.
이 영화에 관한 후기엔 <라쇼몽>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그 반복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환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두 영화의 반복은 미묘하게 다르다. <라쇼몽>이 하나의 상황을 여러 인물의 시선으로 반복한다면 <괴물>은 시작과 끝이 같은 하나의 타임라인을 인물별로 다른 상황을 경유해 반복한다. 인물들이 교차하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독립적인 이야기처럼 보일 때도 있다. <라쇼몽>의 반복은 인물별로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를 통해 인간의 주관성과 그 한계를 보라했고, <괴물>의 반복은 다방면에서 하나의 타임라인을 조립하며 삶의 복잡성을 보게 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와 호리(히이라기 히나타)의 비밀을 알게 되고, 다른 인물의 삶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괴물>의 반복되는 구조 속에 유독 튀는 건 호리 선생(나가야마 에이타)이고, 그의 존재로 <라쇼몽>이 더 많이 생각났을 수도 있다. 미나토의 어머니(안도 사쿠라)의 눈에 비친 그는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교사였지만, 영화 후반부에 알 수 있듯 미나토와 호리를 가장 잘 이해했던 게 호리 선생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동료 교사, 학부모, 학생, 연인에게 모두 외면당하고 외톨이가 되는 존재였다. 심지어 미나토와 요리마저도 그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호리 선생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에게 손 내미는 이가 없고 그의 삶은 붕괴했음에도 호리 선생은 자신을 탓하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태풍 속에 몸을 던졌다.
초반부의 상담할 때 보였던 그는 악인처럼 보였다. 그 첫인상 탓에 꽤 긴 시간 호리 선생을 가해자라 생각한 채 그의 행동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 의도가 있든 없든 호리 선생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괴물들은 그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선 관객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를 향한 좋지 않은 소문을 증거도 없이 믿어버리는 미나토의 어머니처럼 관객도 호리 선생이 폭력적이고 무성의한 교사라고 믿어버렸었으니까. 이렇게 관객이 가졌을 선입견을 꼬집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나의 존재를 규정하고 오해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했다.
<괴물>은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한 존재들이 괴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때로는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존재조차도 말이다. 호리 선생을 생각하며 영화관을 나서는데 어떤 불안감이 엄습했다. 누군가를 단정하고 규정하는 것이 힘이 있는 자(혹은 괴물)의 특혜 같아 보였다. 물론, 호리 선생의 다른 모습과 본성이 영화 속 인물들의 시선과 카메라를 비껴갔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 조명하지 않은 누군가에겐 그가 괴물이었을 지도 모른다. <괴물>이 조명한 이야기도 결국 하나의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조각에 불과하니까.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믿어야 할까. 점점 더 중립 기어를 찾을 일이 많아질 것만 같다. 아니, 그냥 중립에 두고서 살아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