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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Oct 31. 2015

영화 일기#007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

주어진 룰을 거부하는 청소년

<배틀로얄>, <헝거게임>, <메이즈 러너> 이 세 편의 영화가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세 편을 청소년 감금(?) 영화라는 범주로 묶어봤습니다. 청소년을 사회와 격리된 공간에 가두고, 그들을 응시하는 영화. 이 영화엔 이런 질문을 해야겠네요. 누가, 왜 그들을 가뒀는가. 그리고 이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메이즈 러너>가 돌아왔습니다. ‘글레이드’라는 살인 미로를 통과한 토마스 일행의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안전한 억압

 <스코치 트라이얼>은 피폐한 세상 속의 군중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못 봤던 바깥 세상도 많이 망가져 있는, 비정상의 세계임을 볼 수 있는 오프닝이었죠. 그렇다면 탈출에 성공한 러너들이 도착한 곳은 안전한 곳이었을까요. 미로를 통과한 토마스 일행은 새로운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샤워실로 갑니다. 여기서 그들은 글레이드에서 흘렸던 피를 씻어내죠. 이는 과거에 겪었던 악몽을 씻어내고, 그들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 한편으론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의식처럼 보이기도 하죠.


의식을 마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규칙입니다. 토마스 일행은 이 집단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을 구조했고 의식주를 제공하며 안전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신뢰합니다. 생존을 위해 무수히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있어 봤던 아이들. 그래서 그들이 안전을 위해 미지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선택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의문을 가졌고, 그의 영웅적인 호기심 덕분에 토마스 일행은 광활한 자유의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토마스는 알아냈죠. 그들이 도착한 공간 역시 글레이드처럼 자신들을 통제하고 있었고,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끔 안전이라는 가면으로 유혹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안전과 안정이 무엇에 대한 대가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위험한 자유, 그리고 기성세대의 산물

글레이드와 위키드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가진 토마스 일행은 황량한 사막과 무너진 도시 등을 헤맵니다.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영화 속의 공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죠. 우선, 억압에서 벗어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행복이 아닌 ‘크랭크’라는 죽음의 그림자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낀 아이들은 심지어 ‘글레이드’를 그리워하죠. 비인간적이지만, 그 억압 속에서 생존은 가능했었다는 아이러니.


다음으로 재밌는 점은 이 공간이 기성세대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이토록 망가졌는지 아이들은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른들이 만든 공간, 디스토피아이고 그들은 아이들은 그저 태어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 규칙 등을 받아들여야 했죠. 세상을 부순 것, 억압이라는 룰을 만들어 놓은 것 모두 아이들 이전의 기성세대의 산물입니다. 왜 그들은 부서진 건물, 반쯤 쓰러진 문명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야 할까요. 쓰레기 더미, 혹은 위태롭게 기울어진 건물(문명이 파괴, 삶이 무너졌다는 상징적 이미지로도 볼 수 있죠)들을 헤매는 부모 없는 미아들. 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좀 더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자면, <메이즈 러너>는 세대 갈등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기성세대가 그들을 위해 아이들을 가두고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미로라는 우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죠.


문과 문을 통과하는 여정

<스코치 트라이얼>에는 유독 문과 창이 많이 등장하죠. 그 문을 넘어 토마스 일행은 탈출하고 또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아쉽게도 새로운 공간은 늘 새로운 통제의 연속이죠) 문과 창은 세상의 경계 혹은 새로운 공간을 향한 통로로 바라볼 수 있는 기호입니다. 하지만 많은 문보다 영화에서 더 인상적인 이미지는 문과 문 사이의 길입니다. 토마스 일행은 문과 문 사이를 이동할 때 정상적인 공간을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환풍구, 쓰러진 건물, 하수도 등 지도에는 없는 길을 선택하죠. 이는 그들이 정상적인 것이 붕괴한 공간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주어진 길로는 탈출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다시 세대 갈등 이야기로 돌아오게 되네요. 기성세대가 만든 틀 속에서 아이들은 진정한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길을 부숴가면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죠.


미로 밖의 더 거대한 미로, 그리고 탈출구

글레이드라는 미로를 탈출하면 더 이상의 미로는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아이들에게 글레이드 밖은 더 끔찍한 미로였죠. 어디로 탈출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더 광활하고, 더 막연하고, 더 위험한 살인 미로. 새로운 목적지를 정했지만, 토마스 일행에게 그 목표는 걸을수록 더 멀어 보이는 신기루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마주한 이 디스토피아에 진정한 탈출구가 있기는 한 것일까요.


탈출구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디스토피아를 만든 기성세대는 굳이 탈출구를 찾으려 하지 않죠. 눈을 뽑아 현실을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 마약 등의 쾌락, 환상 속에 갇혀 현실을 잊는 모습도 보입니다. 디스토피아에 적응하는 나름의 방법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토마스는 안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탈출구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죠. 다른 러너들은 토마스에게 ‘어떻게’라며 방법을 묻지만, 토마스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물려받은’ 이 세계에서는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려받은 세계는 기성세대의 룰이 장악한 세계이고, 그들의 룰에서는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죠. 그런데 사실 토마스는 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짐하는 저항 자체가 최고의 답이 될 수 있죠. 영화 후반부에 보여준 그의 행동과 결심은 기존의 룰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정립해보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보입니다.


<헝거게임>의 캣니스는 캐피탈의 부조리함을 깨부수기 위해 콜로세움을 부쉈고,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와 요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가능성을 찾기 위해 기차를 부쉈죠. 앞서 청소년 감금물이라고 묶은 영화들엔 이런 공통점도 있습니다. 주어진 룰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청소년들은 그룰을 부수고 대안적인 길을 만들어 간다는 것. 연약한 청소년들이 기존의 부조리를 부수고 희망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런 부류의 영화는 통쾌함과 감동을 전달합니다. 토마스도 위키드가 만든 룰을 부수는 혁명가가 되지 않을까요. 다음 시리즈 <데스큐어>에서 혁명가가 된 청년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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